장애인단체가 서울 여의도 소재 한 증권사 임원을 상대로 기부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회사로 몰려가 집단 시위를 벌였다. “증권사 임원의 동생 때문에 금전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에게서 채권을 기부금 약정으로 넘겨 받았으므로 형이 대신 책임지라”는 게 이유라고 한다.
24일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공갈미수, 채권추심법 위반 혐의로 장애인단체 대표자 A씨 등 2명을 불구속 수사 중이다. 경찰 등에 따르면 A씨 등은 지난 9월부터 증권사 임원 B씨에게 “기간 내에 요청하는 기부금을 지급하지 않을 경우 부득이 직장 등에서 강력한 항의 및 조처를 하겠다” 등 내용 증명을 수차례 발송했다.
A씨는 “단체를 후원하는 C씨가 B씨 동생으로 인해 17억여원에 달하는 금전 손해를 입었고, 회수하지 못하자 해당 금액만큼 본인 단체에 기부금을 약정했다”며 B씨에게 기부금의 대납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C씨로부터 사실상 채권 추심 사주를 받아 B씨에게 동생 대신 책임을 지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B씨는 A씨 측의 내용 증명에 반응하지 않고 지난달 경찰에 공갈미수 등 혐의로 고소장을 냈다. 경찰에 고소를 당한 A씨 단체는 이달 초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장애인 인권 유린 규탄’이라며 500명 규모로 집회 신고를 했다. B씨는 평판 저하를 우려해 집회 개최를 막고자 지난 18일 서울남부지법에 집회 및 시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결론이 나오진 않았다.
결국 지난 20일 오전 9시부터 이 단체가 B씨가 재직 중인 증권사 앞에서 기부금을 내놓으라는 집회를 열었다. 단체 명이 쓰여있는 대형 버스, 탑차 2대, 단체 승합차 여러 대와 전동 휠체어 6대, 확성기 2대 등 장비와 참석자 50여명이 집회에 동원됐다. 참가자들은 B씨의 이름을 가운데 글자만 익명 처리하고 ‘법을 무시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OO증권 OOO을 규탄한다’ 등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동대문구 소재 장애인단체 대표인 A씨는 “약정받은 기부금을 받아내기 위한 집회는 우리도 처음”이라며 “금전적 피해를 본 후원자가 받을 돈을 우리 단체에 기부금으로 약정했는데도 응답하지 않고 경찰에 고소해 집회를 연 것”이라고 했다. 이날 집회엔 B씨 동생에 대한 채권을 주장하는 C씨도 참석했다.
집회 신고자인 단체 관계자도 “후원자가 약정한 기부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증권사에 고용을 요구하는 집회도 아니다”라며 “B씨가 현재(24일)까지 답변이 없어 B씨 어머니 집 앞에도 집회 신고를 해놨고, 이번 주 중에 추가로 여의도에서 집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집회 주최 측이 공개한 채권자 C씨의 입장문에 따르면 C씨는 2018년 4월 서울 도봉구 소재 공동주택 토지 계약금 15억여원을 B씨 동생 때문에 투자했다가 원 토지 소유주에게서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또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B씨 동생에게 2억원가량을 빌려주거나 투자했으나 돌려받지 못했다며 총 17억여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동생이 증권사 임원인 형을 뒷배로 언급하며 돈을 빌리고 투자를 권유했으므로 형인 B씨에게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게 C씨의 논리다.
B씨는 동생과 C씨 사이의 채권·채무 관계가 불분명할 뿐 아니라 설령 동생에게 채무가 있다 하더라도 본인과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장애인단체가 B씨의 어머니가 거주하는 부산 소재 자택 앞에도 집회 신고를 하자 구순을 앞둔 B씨 어머니가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C씨는 B씨의 어머니에게 “일부라도 받아지면 기부하려고 장애인단체에 기부했다. 아들 회사와 자택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하겠다. 절대 포기 못 하고 끝까지 갈 것”이라는 문자 메시지와 연락도 수차례 했다고 한다.
장애인을 동원한 집회에 대해선 법원이 주최자 등에게 실형을 선고한 판례가 있다. 서울북부지법은 공사현장 내 식당운영권 또는 보상비를 요구하며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장애인단체 소속 장애인을 20~100명 동원해 시위를 벌인 폭력행위처벌법상 공동공갈 혐의 사건에서 주동자들에게 지난해 8월 징역 1년 6개월~2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 재판부는 “시위 현장에 장애인을 동원해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했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