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이순재(1935~2025)의 작품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와 같다. 연극으로 출발해 영화와 TV 드라마, 시트콤, OTT까지 무대를 확장하며 69년의 연기 인생을 쌓아온 그는 한국 대중문화의 변화 과정을 온전히 품은 배우였다. 분야와 장르를 가리지 않은 그가 참여한 작품 수는 약 425편에 달한다.
이순재는 1950년대 연극배우로 출발했다.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한 엘리트였던 고인은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을 보고 운명처럼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연극 ‘지평선 넘어’(1956)로 정식 데뷔한 그는 문학성과 사회성을 중시하던 당시 연극계에서 정교한 대사 처리와 발성, 무대 장악력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TV 드라마에서 그의 존재감은 곧 한국 방송사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며 흑백 TV 시대의 초기 작품부터 가족극 전성기, 정치·사회 드라마의 확장, 2000년대 시트콤 붐, 최근의 OTT 제작 환경까지 그는 꾸준히 주요 작품에 참여해 ‘장르와 시대를 잇는 배우’의 드문 위치를 확보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가족 구조 변화를 생생하게 연기한 배우로 평가된다. 1980~90년대 강한 권위를 지닌 아버지상을 지나 2000년대 인간적인 가장의 면모를 보였고, 노년에는 외로움을 지닌 인물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특히 시청률 64%를 돌파한 MBC ‘사랑이 뭐길래’(1991∼1992)는 연기 인생에 있어 새로운 활로를 가져다 준 작품이다. 극중 ‘대발이 아버지’로 열연한 고인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표상을 연기했다. 이후 KBS2 ‘목욕탕집 남자들’(1995~1996)까지 히트시키며 ‘국민 아버지’ 타이틀을 얻었다.
사극·의학·정치극 등 본격 장르극에서도 주요한 인물을 맡았다. 1999년 MBC ‘허준’에서는 스승 유의태 역을 맡아 주인공의 가치관을 세우는 역할을 했다. ‘상도’(2001)·‘이산’(2007) 등에서 절제된 말투로 묵직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지붕 뚫고 하이킥’(2009~2010)에서는 엄격하지만 정 많고 때론 빈틈도 있는 할아버지 캐릭터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시트콤의 흥행으로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여러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tvN 예능 ‘꽃보다 할배’(2013)을 통해서는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2014년, 2015년, 2018년까지 ‘꽃할배’ 맏형으로 인기를 끌었다.
2011년에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멜로 연기를 펼쳤다. 노년의 일상·상실·정서적 교류를 비교적 담담한 연기로 보여줬다. 이는 한국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졌던 노년 멜로 장르에 대한 시도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80대 이후에도 그는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서 활동했다. 촬영 방식과 제작 환경이 많이 달라진 이후에도 “연기는 평생 해도 끝이 없다”, “(연기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계속 새로운 창조를 해야 생명력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임했다. 발성 연습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거나, 촬영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대본을 여러 번 읽는 그의 태도는 후배들에게 일종의 기준으로 남았다. “이미지가 좋은 작품만 고르려고 하면 결국 배우로서의 확장이 멈춘다. 비우고 받아들여야 발전한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고인은 그 조언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줬다. 연극 ‘장수상회’, ‘앙리 할아버지와 나’ 등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몇 시간 동안 라이브로 연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87세이던 2021년엔 연극 ‘리어왕’에서 백발을 풀어헤치고 200분 동안 방대한 대사를 읊어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총 31회를 교체 배우 없이 원캐스팅으로 소화했던 고인은 인터뷰에서 “말년에 필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하는 건데 욕먹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대로 준비를 길게 했다”고 회상했다. 지난해에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로 무대에 섰다가 건강 이상으로 일부 공연 회차를 취소했다.
고인의 드라마 유작은 KBS2 ‘개소리’(2024)다.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이른바 ‘갑질 배우’라는 오명을 쓰고 도망치듯 거제도를 향한 원로배우 이순재가 돌연 소피라는 이름의 개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의 코미디 드라마다. 이순재는 소피의 도움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고인은 이 작품을 통해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라는 유머로 수상소감을 시작한 그는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하다”는 진심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