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제2번,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제1번, 에드바르드 그리그의 협주곡 a단조. 클래식 매니아들이 가장 사랑하는 피아노 협주곡 세 곡이 한 자리에서 연주됐다. 25일 오후 7시30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더 피아노 오디세이(The Piano Odyssey)’에서다.
중앙일보 창간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연주에는 ‘피아니스트들의 대부’로 불리는 지휘자 김대진(63)이 피아니스트 이진상(41), 박종해(35), 김도현(31)과 호흡을 맞췄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중앙음악콩쿠르 수상자 등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J가 맡았다. 해설을 맡은 김호정 중앙일보 음악에디터는 이번 콘서트의 부제인 ‘낭만주의 피아노 콘체르토 마라톤’에 대해 설명하며 “피아노 음악의 전성기를 웅변하는 작품들만 모아 엄선한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포문은 김도현이 열었다. ‘노르웨이의 쇼팽’으로 불리는 그리그가 남긴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자신감 넘치는 25세 청년 그리그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곡이다. 팀파니의 짧은 트레몰로 연타에 이어 유리처럼 부서질 듯 반짝이는 초고음역의 a코드가 강렬하게 울려 퍼지자 관객의 시선은 금세 무대 위로 집중됐다.
변화가 많고 화려한 3악장에선 완급 조절이 일품이었다. 3악장의 후반부에서 화려함을 뽐내던 피아노는 한순간 꺼질 듯 잦아들었다가 춤곡풍의 리듬을 활기차게 연주했다. 이어 열정적으로 몰아치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총주가 몰아치는 종지부를 들은 관객들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배턴을 이어받은 박종해는 피아노가 가진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차이콥스키를 연주했다. 뛰어난 실내악 주자이기도 한 박종해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맞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음량과 템포, 음색을 조절해나갔다. 연신 입으로 선율을 노래하며 연주하는 특유의 제스쳐도 몰입도를 높였다.
피아노 음역대의 양 극단을 오가며 정박으로 D플랫 코드를 강하게 짚어내는 도입부에서는 손이 피아노 위로 튀어 오를 정도로 탄력 강한 터치를 선보였다. 반면 플루트와 피아노가 여유롭게 전원을 그리는 2악장에선 피아니스트도 몸에 힘을 뺀 듯 여유 있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옥타브 더블링 등으로 음표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3악장에서는 미스 터치 없는 완벽한 기교와 힘을 동시에 보여줬다.
마지막 주자 이진상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18살에 협주곡 2번으로 오케스트라와 첫 협연을 하며 ‘무서운 신예’로 불렸던 이진상이다. 20여 년 간 연주해 온 곡인만큼 그의 라흐마니노프는 정확하고도 노련했다.
이진상은 멀리서 들리던 ‘종소리’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강렬한 도입부를 연주하며, 작은 눈덩이를 굴려 몸집을 키우듯 서서히 음색에 깊이를 더하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악상을 불러냈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뚫고 나오는 명료한 타건과 힘도 압권이었다.
초고난도 기교가 쏟아지는 마지막 악장에서 이진상은 집중력과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무대를 장악했다. 후반부에 피아노가 주도적으로 속도를 높이며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구간에선 몸이 뒤로 젖혀지거나 아예 일어날 정도로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날 연주에선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협연자의 호흡도 돋보였다. 피아노 독주를 오케스트라 연주가 이어받는 수많은 브릿지 부분에서는 피아니스트와 함께 호흡하는 김대진 지휘자의 노련함이 발휘됐다. 그는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마다 지휘봉을 잡은 손끝이 빨개질 정도로 열정적으로 음악을 연주했다. 오케스트라J는 그의 지휘에 맞춰 비슷한 듯 다른 각 세 협주곡의 음색, 질감을 연출해냈다.
연주회는 앵콜곡 라흐마니노프의 ‘로망스’로 끝이 났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라흐마니노프는 많은 작곡가들이 택하는 피아노 듀오 편성 ‘포 핸즈(four hands)’에 한 명의 주자를 더한 ‘식스 핸즈(six hands)’의 로망스를 만들어냈다. 이번 연주를 계기로 친해졌다는 세 연주자들은 한 피아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나의 선율을 연주하며 ‘브로맨스’를 뽐냈다. “한국의 피아노 황금기를 알리는” 이번 연주의 취지를 잘 보여주는 엔딩 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