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나 귀가 얇은 사람들에게 정치 양극화 시대는 괴롭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기 검열 상황에 수시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런 얘기 해도 될까’, 스스로 묻게 되는 순간 말이다.
알려진 대로 세운상가는 1960년대 후반 준공 때만 해도 전후 잿더미를 딛고 일어선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과 같은 건물이었다. 1급 상권으로서 생명은 짧았다. 하지만 70~80년대 이곳의 기술자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얘기되는 품목들은 실로 다양했다. 잠수함·미사일부터 인공위성까지 제작할 수 있었다니. 과장치고도 너무 나갔다. 그만큼 저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종묘 앞 세운지구 재개발 문제
정치 양극화 시대 정쟁으로 소비
갈등 당사자, 총리와 시장 만나야
종묘는 어떤가. 95년 팔만대장경·석굴암과 함께 한국의 첫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민족 자존심을 한껏 치켜세웠다. 중앙일보 옛 기사를 검색하면, 중국은 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협약에 가입해 만리장성 등 14건, 일본은 92년에 가입해 호류지(法隆寺) 등 5건이 지정됐는데 한국은 88년에 가입해 이제야 3건이 지정됐다면서도 기뻐하는 대목이 보인다.
귀하거나 의미 있는 두 건축물이 요즘 정쟁 대상으로 소비되는 상황은 순전히 정치권 탓이다. 지난달 말 서울시가 종묘 코앞 1만 평 넓이 세운4구역의 용적률 등을 늘려 고층 재개발의 길을 터주자 당장 국가유산청이 “깊은 유감”이라고 반응한 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치자. 이달 7일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허민 국가유산청장과 함께 종묘를 찾아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종묘를 지키겠다고 했고, 10일 김민석 국무총리 역시 종묘를 찾아 한강버스 문제까지 거론하며 오세훈 서울시를 압박했다.
빛나는 문화유산을 지키겠다는데 토 달 사람은 없다. 하지만 김 총리 등의 일사불란을 마냥 순수한 문제 제기로 봐줄 순수한 사람 또한 없다. 덕분에 민심은 갈라진다. 진영 결집이다. 와중에 세운상가 철거 문제를 다룬 건축가 유현준의 유튜브 에피소드(‘한국에서 건드려선 안되는 OO상가’)는 디지털 장롱에서 꺼내져 새롭게 소비되고 있다. ‘(박원순 시장 시절) 리모델링은 정말 하지 말았어야 할 일’ ‘모든 건축은 정치적’ ‘제자들이 버티고 있는데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을 부수기는 어려울 것’…. 이런 파격적인 내용 때문인지 2년 전 에피소드인데 148만 명이 보고 1300개의 댓글이 달렸다. 종묘 앞 세운지구 재개발 논란이 불거진 이후 붙은 댓글은 23일 오후까지 69개. 상가 철거 찬성 입장이 50개, 반대가 6개, 이도 저도 아닌 반응이 13개쯤 된다. 유 건축가의 요즘 입장이 궁금해 물었더니 “정치 이슈는 일절 노코멘트”라는 답을 전해 왔다.
싸움은 대개 쌍방 과실인 법. 서울시의 처신에도 아쉬움은 있다. 세운4구역 용적률 상향 등을 두고 국가유산청과 협의를 이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상대의 양보가 없다고 지난달 말 재개발 계획을 기습 발표했다. 정부의 즉각적인 흥분까지 내다봤을까. 소위 선거에선 ‘현직 프리미엄’이 있다는데, 오 시장 입장에선 갈등 확대가 반가울지 모르겠다.
고층 재개발이냐, 종묘의 무탈과 세운상가 존치냐. 갈림길에서 무당파는 괴롭다. 서울대 도시계획학과 김경민 교수는 요즘 열일 한다. 스스로 무소속을 자처하며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을 비판했지만, 앞서 10일 김 총리의 종묘 방문 때 동행했다. 최근 SBS 토크쇼(‘뉴스헌터스’)에 출연해 서울시 김병민 부시장에 맞서 세운4구역 재개발 계획의 문제점들을 인상 깊게 지적했다. 서울시가 4구역 용적률을 660%에서 1008%로 높인 건 특혜, 세운상가 철거 후 공원 조성 비용은 용적률 거래제를 법제화해 종묘 앞 용적률은 억제하는 대신 다른 지역에서 용적률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디테일은 사태 파악에 도움이 된다. 서울시(조남준 도시공간본부장) 측의 주장은 이런 거다. 용적률 거래제는 국토교통부 반응이 미온적인데다 설득해 법제화하더라도 몇 년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현재 7000억원가량인 시행사(SH)의 부담과 4구역 토지주들의 추가 비용과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갈등의 핵심인, 종묘 경관을 해치는 4구역 최고 높이(141.9m)에 대해 서울시는 며칠 새 ‘협의 가능’을 언급하고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하나마한 소리 같지만 정쟁화한 갈등은 정치로 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실망감을 안겨주는 미국 정치에서도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무슬림 뉴욕 시장 맘다니를 만났다. 우리 총리와 시장도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