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 연기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69년간 연극·드라마·영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400여 편의 작품에서 활약했던 국민 배우. 지난해 열린 제60회 백상예술대상 무대에서 “예술이란 영원히 미완성”이며 “완성을 향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게 배우의 역할”이라고 했던 ‘최고령 현역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91세.
1934년(호적상으로는 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에서 생활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라 대전에 정착했다. 대전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연극 ‘햄릿’ 무대에 오르며 연기에 대한 애정을 키웠고, 서울대 철학과 3학년이던 시절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후배들 “평생 무대 위 있고 싶다던 분” 이후 그의 활동 기록은 곧 한국 대중문화예술사가 됐다. 연극 무대를 거쳐 1961년 KBS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방송계에 들어온 그는 TBC 공채 1기로 국내 최초 일일연속극 ‘눈이 나리는데’(1964) 등에 출연하며 대중적 입지를 다졌다. 1990년대 ‘사랑이 뭐길래’(1991~1992), ‘보고 또 보고’
(1998~1999), ‘허준’(1999) 등에서 아버지, 스승으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등에선 능청스런 코믹 연기로 ‘야동순재’라는 격 없는 별명까지 얻었다.
배우로서의 마지막은 연극 무대에 집중했다. ‘세일즈맨의 죽음’(2000, 2017), ‘늙은 부부 이야기’(2005) 등에 출연했고, 89세이던 2023년엔 셰익스피어 ‘리어왕’의 주연을 맡아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출연한 드라마 ‘개소리’(2024)로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으로 대상을 받았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라며 수상 소감을 시작한 그는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하다”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의원 생활을 거쳤고, 세종대와 가천대에서 10년 이상 영화예술학과 교수로 일하며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국 문화계에 깊은 족적을 남긴 고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사회 각계에서 그를 기리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25일 SNS에 “한평생 연기에 전념하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품격을 높여 오신 이순재 선생님은 연극과 영화, 방송을 넘나들며 웃음과 감동, 위로와 용기를 선사해 주셨다”며 “남기신 작품과 메시지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질 것”이라고 추모했다.
‘꽃보다 할배’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여행뿐 아니라 사석에서도 늘 ‘끝까지 무대 위에 있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성실하게 일하는 태도가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고 고인을 떠올렸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사위로 연을 맺은 배우 정보석은 “그동안 너무 감사했다. 연기도, 삶도, 배우로서의 자세도 선생님께 많이 배웠다”며 “선생님의 모든 걸음은 우리 방송 연기의 시작이자 역사였다”고 애도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도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 중 TBC 10기 공채 출신인 배우 김성환은 “이순재 선생님 때문에 탤런트를 시작해 더욱 가슴이 아프다”며 “대사 외우실 일도 없고, 촬영하며 밤 안 새워도 되는 편안한 곳에서 잘 계시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이 대통령 “대한민국 문화예술 품격 높여” 고인의 수의를 제작하고 있는 박술녀 한복디자이너는 눈시울을 붉히며 “5~6년 전 우리 한복을 입으셨는데 너무 고우셨다. 원로 배우이신데도 버선까지 마다않고 한복을 다 챙겨 입어주시고, 포즈를 해 달라고 하면 별말 없이 해주셔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정치계 원로인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방송인 박경림, 배우 장용·최현욱·줄리엔강·김학철, 코미디언 최병서, 가수 이용 등이 빈소를 찾았다.
정부는 고(故) 이순재 배우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빈소를 찾아 정부를 대표해 고인의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발인은 오는 27일 오전 6시20분 엄수되며, 장지는 경기도 이천 에덴낙원이다. KBS는 본관·별관에 분향소를 마련해 시민들도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