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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15억 두고 눈감은 아버지, 그가 남긴 '직각의 예술'

중앙일보

2025.11.26 12:00 2025.11.2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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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도널드 저드가 디자인한 의자에 앉은 장남 플래빈 저드. 26일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스토리지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김종호 기자
" 식사나 글쓰기에는 곧은 의자가 가장 좋습니다. (도널드 저드, '가구에 대해', 1986) "

시작은 결핍이었다. 도널드 저드(1928~94)는 1973년 텍사스 서남부 마파(Marfa)에 자리 잡았다.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가였던 그는 육군 기지가 있던 그곳에 집과 작업실, 미술관을 하나하나 만들며 자신의 예술 철학을 구현해 나갔다. 가구도 직접 만들어 썼다. 오늘날 미니멀리즘이라 불리게 된 직각의 의자·책상·침대가 시대를 앞선 그의 미감을 보여준다.

직각의 데이베드에 앉은 플래빈 저드는 "아버지는 어린 나와 여동생을 위해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친 적도, 작거나 불편하다 여긴 적도 없다. 그가 디자인한 침대는 지금도 매일 사용한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저드의 가구만으로 꾸린 국내 첫 전시가 27일부터 내년 4월 26일까지 서울 이태원의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26일 만난 저드의 장남 플래빈(57)은 "당시 마파에는 가구 파는 곳이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목제 가구라곤 흉한 빅토리아풍 가구뿐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쓸 작은 침대와 우리 남매가 쓸 책상 두 개를 만든 게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플래빈은 아버지를 따라 마파에서 자랐고, 1994년 저드가 66세로 세상을 뜬 뒤 저드 재단을 꾸리며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도널드 저드가 서랍이 많이 필요했던 동료 예술가 클래스 올덴버그를 위해 만든 책상(왼쪽). 27일부터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스토리지의 '도널드 저드: 가구' 전시전경. 사진 저드 재단
저드의 가구는 단순했다. 제작 과정도 간결했다. 필요한 가구를 스케치한 뒤 동네 목수에게 맡겼다. 금속 용접 공장을 소개받은 1984년부터는 금속 가구도 만들었다. 전시장에는 저드가 1970~90년대 디자인한 나무·금속·합판 소재 가구 38점이 나왔다. 5점은 오리지널이고 나머지는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 만들었다.

청계천 ‘스프링’의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를 위해 디자인한 서랍이 많은 책상도 전시됐다. 가구를 주문하면서 손수 그린 드로잉, 단순한 사각형과 선명한 색감의 판화 60여점이 함께 걸렸다. 팔걸이나 손잡이 같은 장식 없이 그저 앉거나 쓰는 기능에 충실한 의자와 책상, 헤드 보드 없는 침대가 널찍한 공간에 놓였다. 군용 격납고를 개조해 지낸 그의 마파 작업실과 서재를 닮았다. 다음은 플래빈과의 문답.


Q : 아버지 저드는 어떤 사람이었나.
A : “늘 머릿속에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예술가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모두를 똑같이 대했다. 12살 때 친구들이 놀러 와도 애 취급하지 않았다. 요리는 젬병이었지만, 나와 여동생을 굶기진 않았다(웃음)”
'도널드 저드: 가구' 전시에 나온 저드의 가구 제작 드로잉. 간단한 그림과 사이즈, 설명을 가지고 동네 목수나 용접 공장에 주문했다. 사진 저드 재단


Q : 유년기를 보낸 마파는 어땠나. 그 척박한 곳이 지금은 ‘텍사스의 소호’라 할 정도로, 전 세계 예술 애호가가 모여든다.
A : "1980년대 후반 이웃 마을에 한국인 부인이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따로 부탁해 우리 남매는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마파에 살지는 않는다. 많이 변했다. 30가지 다양한 커피를 맛볼 수 있지만 (생활에 필요한) 배터리는 살 수 없는 곳이 됐다."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스토리지의 '도널드 저드: 가구' 전시전경. 뉴욕 현대미술관(MoMA)와 저드 재단 발행 출판물이 놓였다. 사진 저드 재단
인구 2000명이 채 안 되는 이 외딴 사막 도시는 미니멀리즘의 성지가 됐다. 텍사스의 작은 마을들이 소멸돼 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파의 저드 재단은 2021년 방탄소년단(BTS)의 RM(김남준)이 다녀가면서 그의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2023년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재단 직원은 "남준이라는 한국 가수가 다녀간 뒤 관람객의 평균 연령대가 확 낮아져 놀랐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Q : 저드는 1947년 1년 남짓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한 뒤 돌아가 미술을 전공했다는데.
A : “미국 중서부 출신의 아버지가 처음 경험한 미국 밖 세상이었다. 그가 19세 때 일이다. 김포의 공군 기지에서 보일러를 관리했다고 들었다. 1986년 할머니가 집에서 한국 돈을 찾아 주셨다. 군 복무 당시 받은 원화를 보일러실에서 함께 일한 한국 동료들에게 주려고 모았는데, 복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다시 만날 수 없었다고 했다.”


Q : 2021년 마파에서 윤형근(1928~2007)과 저드 2인전도 열었는데.
A : “1992년쯤이었나 뉴욕에서 윤형근과 아버지와 저녁을 먹었다. 윤형근이 ‘삶이 예술보다 중하다’고 말하자 아버지가 ‘난 잘 모르겠는데’ 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1991년 전시를 위해 한국에 온 저드는 평소 관심 있던 윤형근의 화실을 찾아 그의 그림을 세 점 구입했다. 윤형근의 묵직한 청다색에 반해 함께 전시하자고도 제안했지만 93년 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됐다.

저드가 세상을 떴을 때 플래빈은 26세였다. 아버지가 남긴 건 통장 잔고 200달러와 빚 100만 달러(약 15억원)뿐. “지금으로 따지면 3000만 달러(약 441억원)쯤 될 거”라고 플래빈은 말했다. 아버지 친구인 예술가 댄 플래빈의 이름을 받았고, 조각가 존 체임벌린이나 화가 로니 혼이 수시로 집에 드나드는 유년기는 어땠을까. 그는 “다른 집도 다 그런 줄 알았다. 어릴 때 사람들은 다 글을 쓰든 춤을 추든 예술이나 건축을 하든, 뭔가 만드는 존재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도널드 저드: 가구' 전시 전경. 사진 저드 재단
아버지의 가구에 대해 그가 자주 쓴 단어는 ‘정직함’. “아버지는 금속이라는 소재는 너무도 정직해 색을 덧입혀도 금속임이 명명백백하다고 말씀하셨다”며 “하나의 소재가 다른 소재인 척하는 걸 보면 미칠 것 같다고도 했다. 섬유유리 자체로도 하나의 소재인데 왜 돌인척하느냐는 거다”라고도 덧붙였다. 회화와 조각, 예술과 디자인을 넘어 3차원의 공간 실험을 한 저드는 202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다.




권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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