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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서 2부 거쳐 1부로, 다음은 월드컵

중앙일보

2025.11.27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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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프로축구 전북 현대 우승을 이끈 주장 박진섭. 유력한 K리그1 MVP 후보다. 김성태 객원기자

26일 전북 완주의 클럽하우스. 프로축구 전북 현대 선수들과 코치진은 박진섭(30)을 보고 “MVP! MVP!”를 외치며 지나갔다. 박진섭은 다음 달 1일 열리는 K리그 시상식에서 유력한 MVP(최우수선수) 수상자로 손꼽힌다. 이동경(울산)·싸박(수원FC)과 3파전인데, 최근 5년간 MVP는 우승팀에서 나왔다.

묵묵히 주장 역할을 수행한 박진섭은 지난해 강등권에 그쳤던 전북을 올해 조기 우승으로 이끌었다. 중앙수비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한 칸 올라와 뛴 그는 35경기에 출전해 3골 2도움을 기록했다. 공격포인트는 많지 않지만 거스 포옛 전북 감독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리더”라며 MVP로 추천했다. 이젠 K리그 최고의 선수로 꼽히지만 그는 “축구판 밑바닥부터 올라왔다. 벤치에 앉은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올 시즌 프로축구 전북 현대 우승을 이끈 주장 박진섭. 뉴스1

고3 때 자신을 원하는 대학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시 키가 1m80㎝까지 10㎝ 이상 자라 신체 밸런스가 깨진 탓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에 진학했다. 주변에서는 “축구를 잘한다더니 무명 대학을 가느냐”고 비웃었다. 박진섭은 “운동장이 없어 공원을 떠돌며 훈련했고, 시끄럽다며 주민 신고를 받은 적도 있다”며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건 훈련뿐이었다. ‘난 무조건 될 거야’, 이 꿈 하나로 버텼다”고 회상했다.

팀은 대학 U-리그 꼴찌였지만 2차례 득점왕에 오른 박진섭은 2016년 겨울, 프로팀 대전시티즌 2군 훈련에 참가했다. 대학에는 입단 축하 플래카드까지 걸렸다. 그런데 계약 직전에 대전 감독이 바뀌면서 없던 일이 됐다. 결국 프로팀 지명을 못 받은 그는 이듬해 3부리그 격인 내셔널리그 대전 코레일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뛰었다. 당시 김승희 감독이 “갈 곳 없던 이을용도 코레일을 거쳐 월드컵에 나갔다”고 격려했다.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박진섭은 살아남으려면 다부진 수비형 미드필더가 더 낫겠다고 자기 객관화했다. 수비 땐 거칠고 공격 땐 심플한 신형민(당시 전북)과 카세미루(브라질)의 플레이를 롤모델로 삼아 연구했다.
올 시즌 프로축구 전북 현대 우승을 이끈 주장 박진섭. 유력한 K리그1 MVP 후보다. 김성태 객원기자

2018년 비록 2부리그였지만 마침내 프로팀 안산에 입성했다. 2년 뒤엔 자신을 내쳤던 대전하나시티즌에 보란 듯 입단했다. 박진섭은 “문전박대 당했을 때 대전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었다. ‘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라는 생각에 짜릿했다”고 되돌아봤다. 전주에서 초중고를 나와 전북 현대 최진철을 보며 꿈을 키운 박진섭은 2022년 고향 팀 전북으로 이적했다. 코레일 시절 3000만원 초반대였던 그의 연봉은 스무 배 넘게 올랐다.

팬들은 그런 그를 ‘케이미 바디(K리그 제이미 바디)’라 부른다. 잉글랜드 7부리그에서 1부까지 올라와 2019~20시즌 프리미어리그 득점왕(23골)에 오른 제이미 바디에 빗댄 표현이다.

축구대표팀 박진섭(왼쪽). 뉴스1

박진섭은 군팀 상무 전형에서 탈락해 2023년 입대 날짜까지 잡아뒀다. 그런데 청소년 대표도 못 해본 그는 그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와일드카드(23세 초과선수)로 뽑혔다. 일본과 결승전에서 머리가 찢어졌는데도 붕대 투혼을 펼치며 금메달을 땄다. 박진섭은 “더 큰 상처가 났어도 참고 뛰었을 것”이라고 했다.

2023년 말 늦깎이 성인 대표팀에 뽑힌 박진섭은 이듬해 A매치 데뷔골도 터트렸다. 올해 10월 파라과이, 11월 가나와 평가전에 선발 출전해 무실점 승리를 지켜냈다. 내년 북중미 월드컵 주전 스리백으로 중앙 박진섭, 왼쪽 김민재(바이에른 뮌헨)이 나설 가능성이 높다. 박진섭은 “대학생 땐 월드컵에 나갈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놀라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월드컵 출전은)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다.

얼마 전 취업준비생으로부터 포기하려는 순간 박진섭을 보고 힘을 내 취업에 성공했다는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받은 적도 있다. 박진섭은 연습생 출신 대기만성 공격수 주민규(35·대전)와 얼굴도, 체형도 닮았다. 박진섭은 “나와 (주)민규 형 같은 선수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다는 걸 증명하지 않았나. 질긴 잡초가 밟혀도 살아나 꽃피는 것처럼”이라고 했다.





박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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