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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과의 재회, 부모님에겐 중요했던 이유 [왕겅우 회고록 (23)]

중앙일보

2025.11.28 13:00 2025.11.2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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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으로 / To Nanjing
대가족과의 재접속 / Extended Family

아버지는 고종사촌의 지나치게 호화로운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아서 나를 서둘러 난징에 데려가셨다. 난생처음으로 나흘 동안 그분을 독점하고 지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이 된 그 이야기를 다음 장에서 19개월 난징 시대의 도입부로 삼으려 한다. 여기서는 대가족과의 재접속이 부모님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는지 배경을 설명하겠다.

난징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후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 타이저우(泰州)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사흘 더 지냈다. 숙부님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고 왕씨 집안 종형제들도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가 어머니의 먼 일가 동생과 결혼했기 때문에 일종의 겹사돈 관계였다.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할아버지의 단 하나 여동생인 대고모님이었는데 아버지가 매우 좋아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조프르 로(Avenue Joffre 淮海路)의 그분 아파트에 머물고 계셨다. 거창한 결혼식이 끝난 이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숙부님과 새로 결혼한 사촌을 방문하기까지 하셨다.

상하이에 있는 친척들 이야기를 별로 들은 적이 없던 내게 쟝수(江蘇)와 저쟝(浙江) 중요한 가문들의 넓은 문화적 네트워크를 맛보는 첫 기회였다. 명-청 왕조시대에 번성했던 네트워크였다. 중화제국 어디에나 그런 네트워크가 있었는데 이 두 성에서 특히 번성했다. 우리 대고모님은 쉬센위(徐森玉, 쉬홍바오(徐鸿宝)의 이름으로 더 알려진 저쟝 출신 학자) 선생과 결혼하셨다. 쉬 선생은 널리 존경받는 학자이자 고문서와 골동품의 감식가였다. 청 당안관(當案館)에서 일하고 북경대학 도서관장을 지낸 후 고궁박물원에서 고미술품을 담당하신 분이다. 항일전쟁 중 많은 고서적과 유물을 보호하는 데 공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는 아저씨인 쉬 선생을 매우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했으나 그분 아들 쉬보쟈오(徐伯郊)와는 좀 서먹하셨다. 사업에 재능이 있어서 상하이 주식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마땅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좀체 없으셨는데, 이 사촌동생과 쓰촨 군벌 딸의 호화로운 결혼식에 대한 생각은 내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문화혁명이 진행 중이던 1973년 상하이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쉬 선생이 생전에 그곳 관장을 지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재개관 전이었는데 우리 오스트레일리아 역사학자 방문단에게 특별 관람을 허용했다. 내전 기간에 귀중한 소장품을 보호한 쉬 선생의 공적과 함께 1949년에 고궁박물원 유물의 타이완 반출을 도와달라는 국민당 정부의 요청을 거절한 사실도 들었다.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은 사실도 있었다. 1958년에 “우경(右傾)”으로 비판받고 문화혁명 때 80대 연세로 가혹한 핍박을 당한 사실이다. 1971년 90세 나이에 쓰라린 마음을 품고 돌아가셨다.

국민당 정부가 무너질 때 쉬 선생의 외아들 쉬보쟈오는 홍콩에 사업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 미술품감식가로 변신했다. 1960년대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는 친구인 화가 장다첸(張大千) 작품의 소장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80년대 후반 홍콩대학에 있을 때 그 소장품의 일부를 본 일이 있다. 그가 죽은 10년 후인 2013년 베이징에서 출판된 목록은 장다첸 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1947년 상하이에서 그를 처음 볼 때는 주식시장의 선물거래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나중에 당시 중국의 인플레 상황을 알게 되면서 그의 과단성에 탄복했지만, 국가경제가 무너질 때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그처럼 문예와 골동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잠깐이라도 실전적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하이에서 사흘을 지낸 후 고향으로 출발했다. 전쟝(鎭江)까지 기차로 가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 양저우로 갔다가 셴뉘먀오(仙女庙)란 곳에서 바지선을 탔다. “선녀”라는 이름이 도가 신령에 대한 유구한 믿음을 표현한 전통적 방식으로 느껴져 마음이 끌렸다. 바지선은 복잡한 운하망을 통해 온통 평평하고 축축한 지역을 지나가다가 이따금 마을에 들러 승객을 내리고 태웠다. 타이저우 가는 길의 대부분을 배로 갔다. 마지막 구간을 버스로 가면서 바지선이 더 좋은 이유를 알았다. 버스에는 사람과 가금류를 빽빽하게 태웠고 몇 차례나 고장이 나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가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두 주일을 타이저우에서 지내며 많은 친척을 만났는데, 세세한 부분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에 남은 두 개의 순간은 할아버지를 다시 뵐 때와 1936년에 보던 사촌들을 열 살 더 먹은 나이로 만날 때였다. 그때는 사촌들과 매일같이 함께 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무는 기간이 너무 짧아 서로를 알 틈이 없었다. 여러 해 지난 후 성우가 티벳에서 죽고 청우(안바오)가 위생병으로 한국전쟁에 간 것을 알게 되었다. 청우는 1990년대에 숙부님을 만나러 홍콩에 온 것을 만났는데, 생활에 만족한 것으로 보였다. 그 동생 징우는 러시아어 통역사가 되었는데 2001년 우룸치에서 죽을 때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1947년에 만난 가장 새로운 친척은 다른 숙부님의 외아들인 사촌 중의 막내 웨이우(緯武),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 숙부님은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어서 웨이우는 병든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 곁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갔다가 다시 타이완으로 갔고, 거기서 군 복무를 할 때 진먼(金門)섬에서 공산군 막는 부대에도 잠깐 있었다고 한다. 타이완에서 대학을 다닌 후 뉴질랜드에서 농업을 공부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도서관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시드니에서 자손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역의 판(潘) 씨 집으로 출가한 단 한 분 고모님도 만났다. 1988년 타이저우에 다시 갔을 때 당시 주립 타이저우 고중의 교장이던 고모님의 아들 판쟈한(潘家漢)을 만났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교사로 많이 재직한 학교로, 아버지와 아저씨 여럿이 그 졸업생이었다. 후에 갔을 때는 도시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사시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커다란 왕씨 저택은 불교 양로원의 일부가 되어 있고, 구역 전체가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김기협([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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