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이고, 잘 쉬는 게 중요하죠.” 11월 9일 요르단 암만에서 끝난 2025 16세 이하(U-16) 아시아 여자배구선수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이승여(55) 감독은 엄마처럼 말했다.
아이를 적게 낳는 인구 소멸 시대, 한국 스포츠는 위기다. 선수 부족으로 팀을 구성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몇 년 전부터는 과거엔 적수가 되지 못했던 태국을 만나도 고전을 치른다. 한국의 국제배구연맹(FIVB) 랭킹은 40위. 일본(5위), 중국(6위)은 물론 태국(18위), 베트남(28위), 카자흐스탄(35위)에도 뒤진다. 이런 와중에 중학교 3학년이 주축을 이룬 소녀들이 지난달 아시아 배구 정상에 섰다. 연거푸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준결승에서 일본을, 결승에서 대만을 제압했다.
한국 연령별 대표팀이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건 남녀부를 통틀어 박철우(우리카드 코치)와 문성민(현대캐피탈 코치)이 주축을 이뤘던 2004년 제12회 대회 때 우승한 이후 21년 만이다. 여자팀 우승은 한국에서 개최됐던 1980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제패 이후 무려 45년 만이다.
이승여 감독을 지난 25일 청주 금천중체육관에서 만났다. 1969년부터 85년까지 16년간 184연승을 거둔 여자 배구의 명문구단 미도파 출신이다. 미도파 왕조가 저물어가던 1991년 미도파에 입단한 그는 청소년, 국가대표에도 잠시 몸담았지만 부상이 겹치면서 24세에 코트를 떠났다. 은퇴 후 결혼하고 세 아이를 키우며 생활체육으로 배구를 즐기던 그는 2012년 금천중학교 창단 감독을 맡으며 배구계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 우승은 지난 12년간 자녀 양육과 선수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은 경력단절 여성의 쾌거이자 엄마의 승리다.
우승 비결을 묻자 “기본기와 체력을 중시했다”, “서로 믿고, 빈자리를 채워주자고 원팀 정신을 강조했는데 선수들이 잘 따라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대입 수석 합격자의 뻔한 대답처럼 들리기도 한다. ‘원팀 정신’을 강조하지 않는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차이는 디테일에 있다.
“기본기는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라며 지겨울 정도로 반복 훈련을 중시하는 ‘호랑이 감독’은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원팀’으로 묶기 위해 여우처럼 꾀를 냈다. 그는 “운동시간에 규칙만 잘 지키면 나머지는 맡기겠다”고 선수들의 자발성을 유도했다. 그에게 어떤 규칙인지 물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도록 했다.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경기에 집중하기 어렵다”, “경기 때 코트에선 걷지 말고 가볍게 뛰라고 했다”고 답했다. 철저한 규율을 바탕으로 활력이 도는 팀을 만들기 위한 규칙들이다. 또 이 감독은 “방이 깨끗해야 훈련도, 경기도 더 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엄마 같은 잔소리를 선수들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되묻자 “손서연(경해여중), 장수인(경남여중), 여원(천안청소고) 같은 주축 선수들이 잘 받아들이면 모두 잘 따른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잔소리가 아니라 감독의 엄마 같은 진심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는 감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선수들을 잘 먹이고, 잘 쉬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표팀에선 기회가 없지만 금천중 제자들에게는 때때로 직접 밥을 해 먹인다. 이 감독은 “육회비빔밥을 해줬는데, 육회가 넉넉해 선수들이 이젠 다른 곳에선 육회비빔밥을 못 먹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 교사는 “곰탕, 김치찌개가 정말 맛있어요”라고 거들었다. 또 이 감독은 “이번 대회 기간에는 선수들의 동의를 받아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고 휴식기에 잠깐씩만 쓰도록 했다. 휴대폰을 사용하면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하기 때문”이라며 “지금은 힘들지만 귀국할 때 웃으면서 돌아가자며 선수들을 설득했다”고 했다.
금천중 감독을 맡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세 아이를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웠다. 시집간 큰딸은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고 있다. 큰아들은 대학까지 야구선수를 하다가 학업으로 방향을 틀어 지금은 스포츠 경영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막내아들도 야구선수를 했고, 지금은 중학교 야구 코치로 일한다. 이 감독은 “내가 선수들을 가르치다 늦게 귀가하면 막내아들이 ‘엄마는 배구부 엄마야, 내 엄마야’라고 불평했다”고 회상하며 “지금은 막내아들도 나처럼 저녁 늦게까지 선수들을 지도하더라”고 말했다.
MVP는 1m81cm 장신 공격수 손서연이 뽑혔지만, 이 감독은 리베로로 궂은일을 도맡아 한 여원을 숨어있는 우승 주역으로 칭찬했다. 제2의 김연경으로 기대를 받는 손서연을 중학 시절의 김연경과 비교해달라고 부탁하자 “김연경은 중학교 때까지 키가 작았다”면서 “아직은 성장기다. 어떤 선수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손서연은 좋은 경험을 많이 쌓고 있다. 그럴수록 기본기를 더 잘 닦아야 한다”고 애정어린 조언을 했다.
내년 8월 칠레에서는 U-17 세계선수권이 열린다. 이 감독은 “아시아 팀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을 내면서 4강 안에 들면 좋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대회 직전에만 대표팀을 소집하는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모여서 중간 점검을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선수들이 기본기를 잘 쌓고 있는지, 체력훈련을 잘 하는 지 틈틈이 살펴보고 싶은 ‘엄마 같은 감독’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