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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부터 묶게 하니, 소녀들이 팀이 됐다

중앙일보

2025.11.3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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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만에 U-16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이승여 감독. 미도파 선수 출신으로 결혼 후 아이 셋을 키우며, 배구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애정 어린 잔소리와 속정으로 사춘기 소녀 선수들을 원팀으로 이끌었다. 김성태 객원기자
지난달 9일 요르단 암만에서 끝난 2025 16세 이하(U-16)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끈 이승여(55) 한국 U-16 여자배구대표팀 감독은 엄마처럼 이렇게 말했다. “잘 먹고, 잘 쉬는 게 제일 중요하죠.”

저출생 여파로 많은 스포츠 종목이 꿈나무 구인난을 겪는다. 이는 전력 약화를 불렀는데, 여자 배구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한참 아래였던 상대한테도 고전하기 일쑤다. 실제로 한국 여자의 국제배구연맹(FIVB) 랭킹은 40위로, 일본(5위), 중국(6위)은 물론 태국(18위), 베트남(28위), 카자흐스탄(35위) 아래다. 이 와중에 중학 3학년생이 주축인 소녀들이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한국은 지난달 U-16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 준결승에서 일본을, 이어 결승전에서 대만을 차례로 제압했다. 대만은 중국을 꺾고 결승에 올랐다. 한국이 연령별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한 건 2004년 남자팀 이후 21년만, 여자만 따지면 1980년 이후 45년 만이다.

이 감독을 지난달 25일 충북 청주 금천중에서 만났다. 그는 옛 여자 배구 명문 미도파 선수 출신이다. 국가대표팀에도 잠시 몸담았지만, 부상으로 24살의 나이(1994년)에 코트를 떠났다. 결혼 후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배구를 취미로 즐겼다. 그러다가 2012년 금천중 배구부 창단 감독을 맡았다. 이번 우승은 지난 13년간 자녀 양육과 선수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았던 엄마의 승리이자 경력 단절 여성의 쾌거다.

우승 비결부터 물었다. 이 감독은 “기본기와 체력을 중시했다”며 “서로 믿고, 빈자리를 채워주자고 원팀 정신을 강조했는데 선수들이 잘 따라줘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원팀 정신’을 강조하지 않는 지도자가 어디에 있나. 차이는 디테일이었다. 그는 “기본기는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라며 반복 훈련을 강조한 ‘호랑이’ 감독이었다. 동시에 사춘기 소녀들을 ‘원팀’으로 묶기 위한 꾀를 낸 ‘여우’ 감독이기도 했다. “운동 시간 규칙만 잘 지키면 나머지는 맡기겠다”며 선수들의 자발성을 유도했다. 어떤 규칙인지 묻자 “머리를 단정히 묶도록 했는데, 머리를 쓸어넘기다 보면 경기에 집중하기 어렵다” “경기 중엔 걷지 말고 가볍게 뛰라고 했다” “방이 깨끗해야 훈련도 경기도 더 잘할 수 있다”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엄마 같은 잔소리를 선수들이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는 “손서연(경해여중), 장수인(경남여중), 여원(천안청수고) 등 주축 선수들이 잘 받아들이니 모두 잘 따랐다”고 말했다.

이 감독 잔소리에는 ‘속정’이 담겼다. 그는 감독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선수들을 잘 먹이고, 잘 쉬게 하는 것”을 꼽았다. 대표팀에선 기회가 없었지만, 금천중에선 제자들에게 때때로 직접 밥도 해 먹였다. “한번은 육회비빔밥을 해줬는데, 육회가 넉넉해 다른 곳에선 못 사 먹겠다고 하더라”라는 그의 말에 동료 교사가 “곰탕, 김치찌개도 정말 맛있다”고 거들었다. 그는 이번 아시아선수권 대회 기간 선수들 동의를 받아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고 휴식 때만 잠깐 쓰게 했다. “휴대폰을 하면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웃으며 귀국하자”는 말로 선수들을 설득했다.

이 감독은 자신의 세 아이도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웠다. 결혼한 큰딸은 어린이집 교사, 큰아들은 스포츠 경영학 박사 과정, 막내아들은 중학교 야구 코치다. 그는 “선수들을 가르치다 늦게 귀가하면 막내아들이 ‘엄마는 배구부 엄마야, 내 엄마야’라고 불평했는데, 지금은 나처럼 저녁 늦게까지 선수들을 지도한다”고 전했다.

‘제2의 김연경’으로 기대를 모으는 여중생 거포 손서연. 대회 MVP로 뽑혔다. [연합뉴스]
장신(1m81㎝) 공격수 손서연은 이번 아시아선수권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제2의 김연경’으로 기대를 모으는 손서연을 김연경과 비교해달라고 하자 “어떤 선수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며 “좋은 경험을 많이 쌓고 있다. 그럴수록 기본기를 더 잘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 8월 칠레에서 U-17 세계선수권이 열린다. 이 감독은 “4강에 들면 좋겠다”며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모여 중간점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선수들의 성장세가 늘 궁금한 ‘엄마 같은’ 감독의 희망 사항이다.





이해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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