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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이름표 달자' YS 기습작전…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드러났다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56>]

중앙일보

2025.11.30 12:00 2025.11.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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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56> 금융실명제 실시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45분에 전격 발표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발표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1993년 8월 초. 과천 주공아파트 관리사무소로 505동 304호에 대한 주민 신고가 들어왔다. 밤늦게까지 타자 치는 소리와 파쇄기 소리, 사람 목소리가 계속 들리고 넥타이 맨 남자들이 우글대는데 간첩 같다는 것이었다. 대학교수들이 남북통일 용역 연구를 하고 있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이곳은 재무부가 금융실명제를 준비하는 비밀 아지트였다. 바로 여기서 한국의 경제 질서를 바꾼 금융실명제가 은밀하고 위대하게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첫 시동에서 발표까지 불과 4개월. 금융실명제는 철저한 보안 속에 치러진 속도전이었다. 93년 4월 중순 김영삼(YS) 대통령의 지시로 이경식 부총리가 꾸린 한국개발연구원(KDI)팀이 초안을 마련했다. 5월에 재무부가 가세했고, 곧이어 과천 아파트에서 합숙하며 시행을 준비했다. 일부 공무원은 가족과 주변에 “해외 출장 간다”고 하고서는 아지트로 들어갔다.

8월 12일 오후 7시45분. YS가 방송 카메라 앞에 섰다.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을 발표합니다…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혼란을 막기 위해 발표 이튿날 오전에는 은행 영업을 정지시켰다. 시민들이 은행 안내문을 보고 있다. [중앙포토]
특별 담화를 시작하고 15분 뒤인 오후 8시에 긴급명령이 발동됐다. 모든 금융거래, 즉 예·적금과 보험뿐 아니라 자기앞수표, 양도성예금증서(CD), 회사채 등의 발행과 이자 지급, 상환에 실명제가 적용됐다. 실명 전환하면 계좌별로 최대 5000만원까지 자금 출처 조사를 면제했다. 전환 의무기간은 2개월이었다. 이행하지 않은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6년에 걸쳐 매년 10%씩, 최대 60%까지 과징금을 매기도록 했다. 실명제 실시 직전을 기준으로 가명·차명 계좌 자금은 약 33조원으로 추산됐다. 당시 전체 금융자산(330조원)의 10%에 이르는 규모였다.

청와대 경제수석도 발표 직전까지 몰라
실명 전환 기한 마지막 날 은행을 찾은 고객들. [중앙포토]
돈에 꼬리표를 다는 금융실명제는 기습작전처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박재윤 청와대 경제수석도 발표 2시간 전에야 통보를 받았을 만큼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했다. 임기 초 YS가 “금융실명제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물었을 때 박 수석이 “경제가 나아지면 하는 게 좋겠다”고 답하자 실명제 추진 의지가 약한 것으로 보고 박 수석을 배제했던 것이다. 긴급명령이란 방식을 택한 이유도 있다. 국회 입법 과정을 거치면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금융실명제의 취지가 변질되고, 또한 논의 과정 중에 가명 예금주들이 돈을 해외나 부동산 쪽으로 빼돌려 경제에 충격을 미칠 수 있어서다. YS 자신이 헌법을 뒤져가며 긴급명령이란 방법을 찾아냈다.

사실 금융실명제는 전두환 정부 때인 82년에 처음 추진됐다.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으로 사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하경제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수습책으로 금융실명제가 부각됐다. 당시 은행 거래는 40% 이상이 가명·차명이나 무기명이었다. 강경식 재무부 차관(후일 경제부총리)은 “사채 시장을 양성화하고 조세정의 실현을 위해 무기명 거래를 없애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나웅배 장관은 국회에서 금융실명제 시행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에 힘을 실은 건 전두환의 경제 교사였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그는 지하에서 유통되는 음성 자금을 양성화해 산업 자금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금융실명제를 그 방안으로 여겼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라도 금융실명제 실시가 필요하다며 대통령을 설득했다. 법제화에 착수했지만 여당을 비롯해 권력 실세인 허화평·허삼수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의 반발이 거셌다. 시장의 혼란도 이어졌다. 은행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고 자금이 부동산으로 이동하며 아파트값이 치솟았다.

결국 전두환은 한발 물러섰다. 금융실명법은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시행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고서 통과됐다. 사실상 무기한 연기였다. 그럼에도 금융실명제의 씨앗은 뿌려졌다. ‘금융실명제=사회 정의’라는 등식이 각인되면서다.

실명제는 87년 대선 때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민주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면서 82년엔 반대했던 노태우 후보도 금융실명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정권을 잡은 뒤에는 실명제와 금융소득 종합과세 준비 작업에 돌입했으나 경기 악화 속 반대론자들의 거센 저항에 결국 유보를 선언했다.

두 번 좌초했지만 헛되지만은 않았다. 첫 시도가 금융실명제의 씨앗을 뿌렸다면, 두 번째 시도는 금융실명제가 튼튼하게 뿌리 내릴 토양을 만들었다. 89년과 93년 금융실명제 작업에 참여한 최규연 전 조달청장은 “89년에 우리가 실명제 준비를 거의 다 했다. 93년 YS가 지시한 지 넉 달 만에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할 수 있었던 것도 89년에 사실상 대부분 준비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코리안 미러클 6-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는 92년 대선 후보들의 주요 공약으로 재등장했다. 대권을 쥔 YS는 금융실명제 도입을 서둘렀다. 경제적 측면에 무게를 뒀던 과거와 결은 달랐다. 비리 척결과 정치 자금 개혁 등에 초점을 맞췄다. YS식 정치 개혁 로드맵의 하나였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금융실명제는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공직자 2만5000명에 대한 재산등록을 마감한 바로 다음 날 전격 실시됐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들이 실명제 소식에 축배를 들고 있다. [중앙포토]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내가) 82년 입법한 금융실명제는 금융소득에 과세하는 등 세제 개혁과 조세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하경제 규모도 줄이고 사회정의도 구현할 수 있었지만, 부수 효과였다. 93년 금융실명제는 부정부패와 부정 정치자금 척결을 위한 수단으로 실시한 것”이라고 했다(『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YS도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상』에 ‘비실명 금융거래 관행이 장기간 지속되는 과정에서 음성 불로소득이 만연하고 지하경제가 확산되며 부정 축재 자금, 부동산 투기 자금, 범죄 자금 등이 가·차명 예금을 통해 세탁되고 있었다. 훗날 전두환·노태우도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축재 자금을 가·차명으로 숨겨온 것이 밝혀졌다’고 썼다.

시행 1년 새 6조3000억원 실명 전환
2011년 전북 김제시 마늘밭에서 현금 110억원이 발견됐다. 금융실명제로 갈 곳을 잃은 불법 도박 사이트 수익금이었다. [중앙포토]
전두환은 재임 중 9500억원 불법 정치자금을, 노태우는 비자금 4500억원을 조성한 것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실명제 덕이 컸다. 노태우의 가·차명 계좌를 관리하던 은행 직원이 처벌받을까 두려워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YS의 아들 김현철씨의 비자금이 실명제 때문에 드러나게 된 건 아이러니라고 할까. 그 뒤에도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 등 검은돈 관행이 이어졌지만, 정경유착의 고리는 약해졌다.

금융실명제는 한국 경제와 금융의 체질을 개선하며 빠르게 안착했다. 시행 1년 뒤인 94년 8월까지 가·차명 예금의 실명전환율은 98.1%, 실명 전환액은 6조2740억원에 달했다. 사실 차명은 가명과 달리 실명제 위반이 아니다. 그러나 차명도 위법이라 지레짐작한 예금주들이 대거 완전 실명으로 전환했다.

실명제 1주년 백서. 1만원권에 주민등록증을 붙여 금융실명제를 표현했다. [사진 신한은행 한국금융사박물관]
돈에 이름표를 달게 되면서 사채 시장 비중은 작아졌고, 금융 회사로 자금이 유입되며 금리가 낮아지고 통화정책의 효율성도 높아졌다. 금융 거래 및 과세 투명성이 확보돼 금융소득 종합과세의 기반이 마련됐다. 그 결과 조세 정책의 실효성·형평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기업 경영의 투명성 역시 높아졌다. 뒷돈으로 공공기관 납품을 따내던 기업들이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한층 챙기는 계기도 됐다.

각종 제도와 법규가 마련되고 전산시스템이 갖춰진 데다 금융정보분석원(FIU) 등을 통해 수상한 금융거래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는 등 이른바 ‘축적의 시간’을 거치며 금융실명제는 한국 경제의 기본값이 됐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의 촘촘한 그물 탓에 비실명으로는 온라인에서 간단한 쇼핑조차 어려워지면서 핀테크를 비롯한 혁신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시대가 지나면 제도도 낡는다. 금융 거래의 투명성과 조세의 형평성은 살리되, 이젠 달라진 몸에 옷을 맞춰 줘야 할 때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한민족 네트워크’ 편입니다.




하현옥([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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