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대 그룹 고위 임원은 내년도 경영 기조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격적인 투자로 경제 성장을 주도하던 기업들의 ‘야성’(野性)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경기 둔화와 글로벌 불확실성이 장기화한 데다, 기업 규제는 더 강화되다 보니 기업들은 내년도 사업계획의 무게 중심을 ‘확장’에서 ‘유지’로 옮기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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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경영’…인력이 첫 타깃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30인 이상 기업 229곳 중 내년 계획을 수립한 기업을 대상으로 경영 전망을 조사한 결과, 39.5%가 ‘현상 유지’, 31.4%가 ‘긴축 경영’을 계획했다. 현상 유지와 긴축 경영을 택한 응답이 70%를 넘기며 ‘버티는 경영’이 대세로 자리잡은 셈이다. ‘확대 경영’은 29.1%에 그쳤다.
긴축을 선택한 기업들의 1순위 수단은 인력운용 합리화(61.1%)였다. 2017년 전망조사 이후 9년 만에 인력 조정이 긴축의 최우선 수단에 꼽혔다. 실제로 불황 업종들은 올해부터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석유화학(LG화학), 철강(현대제철), 가전(LG전자), 통신(SK텔레콤·LG유플러스), 유통(11번가·현대면세점) 등이 사업재편과 수익성 중심 강화를 명분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채용 계획 질문에서도 ‘금년 수준 유지’를 택한 기업이 52.3%로 가장 많았다. 특히 300인 이상 대기업만 놓고 보면 채용 축소가 41.0%로 가장 높았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500대 기업 중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제출한 152곳을 분석한 자료에서도 비슷한 흐름은 확인된다. 지난해 신규 채용 규모는 15만4266명으로 전년 대비 12% 줄었고 2년 전보다 29.9% 감소했다. 취업준비생 박모(26)씨는 “웬만한 대학 나오고 인턴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문과는 취업이 쉽지 않다”며 “기업들이 인공지능(AI) 기반 직무만 늘리고 기존 직군 채용은 줄이는 분위기”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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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투자는 축소, 해외로 눈 돌린다
투자 측면에서도 신중론이 팽배했다. 전체 기업 중 48.3%가 올해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답했다. 특히 300인 이상 기업은 국내 투자 축소(40%) 의견이 확대(25%)나 유지(35%)를 웃돌았다. 반면 해외 투자에 대해서는 45.7%가 확대를 선택했다. 수년 전부터 늘어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로 이전에 이어, 대미 투자 확대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제조 대기업이 진출하면 관련 1,2차 협력업체도 함께 해외 이전을 할 수밖에 없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16일 재계 총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미(對美) 투자가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국내 투자가 줄어들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균형 있는 투자 기조를 당부한 바 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전기요금과 인건비가 치솟는 상황에서 국내 설비 투자를 지속하는 건 고정비 폭탄을 감수하라는 말과 같다”며 “노란봉투법과 상법 개정 같은 정책 변수까지 겹치면서 기업들이 불확실성에 대비해 방어적 기조를 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다”고 토로했다. 여당은 상법 1·2차 개정,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에 이어, 연내에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상법 3차 개정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상우 경총 경제조사본부장은 “우리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도 국내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고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기업 규제는 최소화하고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보다 과감한 방안들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