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그는 1887년 러시아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나 유대인 가정의 전통과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고향에서의 추억을 마음에 새겼고, 이 기억들은 삶과 예술을 잇는 원천이 되었죠. 부모의 지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을 공부한 마르크 샤갈은 1914년 베를린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을 계기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어요. 이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예술적으로 황금기를 누렸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했죠.
그는 표현주의·초현실주의·오르피즘(Orphism·색채성이 풍부한 입체주의의 한 분야) 등 20세기 주요 미술 사조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샤갈은 회화뿐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벽화·무대 미술·공예·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매체로 예술적 영역을 확장했으며, 특히 판화 작업에 깊은 열정을 기울였죠. 흑백 에칭과 목판화, 다색 석판화까지 판화 영역에서만 1000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어요. 이러한 판화 프로세스는 그래픽 아트에 속하는데요.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20세기 미술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마르크 샤갈의 작품을 망라해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회가 경기도 고양시 고양시립 아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어요. ‘마르크 샤갈: 20세기 그래픽 아트의 거장, 환상과 색채를 노래하다’ 전시회는 1948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판화로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판화가였던 샤갈을 집중적으로 조망합니다.
이번 전시회 출품작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샤갈의 그래픽 아트 컬렉션으로 독일의 부아세레 갤러리가 27년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이죠. 부아세레 갤러리는 1838년 쾰른에서 요제프와 니콜라우스 빌헬름 부아세레가 설립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입니다. 샤갈이 전 생애 걸쳐 이룩한 판화 작업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대규모로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는 오리지널 판화를 비롯해 유화·드로잉·아트북 등 300여 점을 선보이는데요. 전시는 연대기적 구성에서 탈피해 ‘사랑을 노래하다’ ‘환상의 세계에서’ ‘신에게 다가가다’ ‘파리, 파리, 파리’ ‘빛과 색채’ ‘영원한 이방인’의 6개 섹션으로 구성됐죠. 주제별 작품 분류 및 구성에 따라 관람객들은 샤갈이 평생에 걸쳐 천착한 중요한 테마를 작품과 함께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샤갈에게 사랑은 예술의 시작이자 근원이었어요. 그의 작품에는 부모와 두 아내, 자녀뿐 아니라 자연과 고향, 전통, 이야기, 그리고 이상을 향한 깊고 무한한 애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은 그에게 창의력의 원천이자 삶을 이끄는 힘이었죠. 사랑에 대한 갈망은 샤갈에게 세상을 탐구하고 삶을 이어갈 용기를 주었어요. 샤갈의 그림에는 포옹하는 연인, 활짝 핀 꽃, 순한 동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사랑을 노래하다’ 섹션에서는 1952년 출판업자 테리아드의 의뢰로 제작된, 그리스 신화 속 가장 오래된 사랑 이야기 중 하나인 『다프니스와 클로에』 삽화 연작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샤갈의 판화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국내 최초로 전 작품이 공개됐거든요.
염소치기와 양치기가 키운 두 고아,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성장과 사랑을 다룬 이 작품에 깊이 몰입하고자, 샤갈은 아내 바바와 함께 그리스로 향했죠. 그는 그리스의 눈부신 햇살과 푸른 바다, 고대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듯한 풍경 속에서 강렬한 영감을 얻었어요. 『다프니스와 클로에』 삽화 제작은 섬세하고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1952년 시작해 1961년에야 완성한 이 작품에는 총 42점의 컬러 석판화 작품이 수록되어 있죠.
샤갈은 한 점의 컬러 석판화를 완성하는 데 평균 25점의 색판을 만들었다고 해요.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위해 총 1000장에 달하는 색판을 제작한 것이죠. 자연의 순환, 계절의 변화, 인간과 동물의 공존, 그리고 사랑이 지닌 변화의 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은 샤갈의 삽화는 작품 전반에 스며들어 감정의 깊이와 시적인 울림을 더하죠. 성보라 도슨트가 “이 작품을 만들 때 샤갈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바바라는 여성과 재혼하고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거든요.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작가의 새로운 사랑과 감정, 그 열정 같은 개인의 삶이 반영됐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습니다.
‘환상의 세계에서’ 섹션은 마치 서커스 무대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커튼이 쳐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죠. “샤갈은 어린 시절 기억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서커스는 내 인생 최초의 예술'이라고 했는데요. 서커스에서 목숨을 걸고 곡예를 하는 것을 보며 본인이 하는 예술과 근원적으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는 게 예술과 서커스의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순수 추상보다 인간의 기억과 감정, 환상적 상징이 어우러진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샤갈은 농부와 음악가 등 고향의 인물들을 파리의 지붕 위로 날아오르게 하거나, 환상적인 풍경 속에 떠다니는 모습을 그렸죠.
그는 현실을 초월한 세계를 동경했고 서커스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어요. 서커스는 비범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삶의 환희와 슬픔, 찰나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장소였습니다. 서커스는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 세계였고, 평생 그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됐죠. 그는 서커스를 주제로 한 판화 포트폴리오 ‘서커스’를 제작하기도 했어요. 1967년 다색 석판화 23점과 흑백 석판화 15점이 수록된 『서커스』가 출간되었습니다. 샤갈은 직접 글을 기고해, 자신이 서커스에 매료된 이유와 그 속에서 경험한 시적이고 심오한 세계를 독자에게 풀어냈죠. 전시장에선 『서커스』 삽화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다양한 책 삽화를 제작했으며, 직접 글을 쓰기도 했어요. 첫 삽화 작업은 그가 직접 고른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1842)에 실렸죠. 1948년 출간된 96점의 흑백 에칭에서 샤갈은 소설 속 장면을 재치 있게 그려내며, 기괴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특히 그는 죄를 탐하는 인간 군상을 에칭 기법으로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어요. 꿈과 환상을 노래하는 샤갈의 작품 중 현실의 문제를 이처럼 직설적으로 다룬 경우는 드물죠. 이렇듯 샤갈의 집요한 탐구는 인간의 원죄와 이를 구원하는 존재인 신에 대한 그의 평생의 갈망을 잘 보여줍니다.
샤갈에게 빛과 색채는 인간과 신을 잇는 영감의 언어였어요. 그는 빛을 통해 신성함을 느끼고, 색을 통해 감정을 이야기했죠. 빛과 색채 섹션에서는 이러한 예술세계가 응축된『성경』연작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문학과 신앙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샤갈은 1931년 출판업자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의뢰로『성경』연작을 제작했죠. 1931년부터 1956년까지 약 25년에 걸쳐 완성된 이 시리즈는 그가 예술과 신앙을 얼마나 치열하게 탐구했는지 보여줍니다. 샤갈은 1931년 봄, 팔레스타인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며 구약성서의 배경을 직접 체험했죠. 이 여정은 그가 성경 속 인물과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해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경험은 작품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웅장한 건축과 자유로운 사유가 공존하는 파리는 샤갈의 예술을 성장시킨 기반이 되었는데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파리를 떠났던 그는 파리를 언제나 마음속에서 그리워했죠. 그의 그림 속 에펠탑과 노트르담은 그리움과 사랑,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노트르담의 괴물들’에서는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에 걸려 있는 괴수 조각을 동물로 표현한 그림이 인상적이죠.
샤갈은 평생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1968년 출간된 『시』에는 그가 평생 품어온 단어와 이미지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죠. 다만,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시를 발표하지 않았어요. ‘정원’(1909)과 같은 초기 시들은 그가 드물게 사용한 목판화 기법과 함께 소개됩니다. 목판화는 나무판에 이미지를 새기고, 돌출된 면에 잉크를 묻혀 인쇄하는 가장 오래된 판화 기법 중 하나로 특유의 질감과 강한 대비가 돋보이죠. 샤갈은 평소 에칭이나 석판화 같은 기법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목판화를 활용한 작품은 매우 드뭅니다. 이 책에서 목판화가 지닌 독특한 물성과 조형적 특성이 샤갈의 시적 언어와 결합된 방식을 확인할 수 있어요.
샤갈이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삽화를 준비하며 찾아간 그리스에서의 생생한 경험과 감정은 훗날 『오디세이아』 연작의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샤갈은 87세에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삽화 작업에 착수했죠.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샤갈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여정이었습니다. 『오디세이아』는 재치와 용기로 시련을 극복하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죠. 샤갈은 오디세우스의 서사에서 전투의 승리가 아닌 20년 동안 남편의 귀환을 기다린 아내 페넬로페의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에 주목했어요. 그는 이 작품에 온 열정을 쏟아부으며 82점의 석판화를 세밀하게 다듬었죠. 샤갈이 남긴 『오디세이아』는 오늘날까지도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삽화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번 전시에선 그래픽 아트의 거장으로서 샤갈을 소개하다 보니 작품 곳곳에서 몽환적인 색채와 유려한 선의 표현이 고전 서사와 조화를 이루며 문학과 시각 예술의 절묘한 융합이 돋보이는 게 특징인데요. 무엇보다 샤갈이 전하는 따뜻하고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죠. 사랑·환상·신·파리·색채·이방인의 6가지 테마로 구성된 공간에서 샤갈의 꿈과 낭만, 무한한 상상력을 만나보세요.
‘마르크 샤갈: 20세기 그래픽 아트의 거장, 환상과 색채를 노래하다’
기간 2026년 2월 28일(토)까지
장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앙로 1286 고양시립 아람미술관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1월 1일·설날 당일 휴관, 입장은 오후 5시 마감)
관람료 성인 2만원, 청소년 1만6000원, 어린이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