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2000년대 초 청순미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던 배우 명세빈(50)이 2025년 ‘내조의 여왕’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그가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에서 열연한 김낙수 부장(류승룡)의 아내 박하진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매일을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닮았다. 남편의 실직 위기에 가계부를 펴며 묵묵히 중심을 잡는 이상적인 아내상이기도 하다.
특히 대기업 ACT 부장으로 근무했던 김낙수가 희망퇴직을 하고 온 날 장난스럽게 말을 걸다가 “수고했어, 김 부장”이라고 안아주는 장면은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류승룡이 건넨 “미안해”라는 애드립에 명세빈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라고 받아준 순간, 극 중 25년 차 부부의 완벽한 호흡이 느껴졌다.
입소문을 타고 공감대를 넓혀간 ‘김 부장 이야기’는 지난 10월 25일 2.9%로 조용히 출발해 최종회(12화·11월 30일 방송)에서 7.6%까지 시청률을 끌어올리며 ‘생활밀착형 드라마’로 의미 있는 성취를 남겼다.
1일 서울 강남역 부근 한 카페에서 만난 명세빈은 아직도 하진을 떠나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마지막 회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열심히 살아가며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한 낙수, 하진을 보며 여운이 오래 남는다”고 종영 소감을 밝혔다.
‘김 부장 이야기’에서 보여준 연기력에 극찬 반응이 쏟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선 “이렇게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놀라고 있다. 칭찬에 감사하고 용기도 얻었다. ‘타고난 연기 천재가 아닐지라도 나이가 들면서 연기가 더 깊어져 가는구나’ 그런 용기를 얻는 동시에, 다음 작품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고 웃었다.
명세빈은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지점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다고 했다. “우리 가족도 생각나고 주변 지인도 떠올랐다. 부부가 만나는 고난은 특별한 게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누가 잘못하지 않아도 살다 보면 그런 큰 산을 만날 수도 있고,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위로가 이 작품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 속 가장 기억 남는 대사로는 “김낙수, 넌 왜 그렇게 짠하냐?”를 고르고 “하진이 낙수를 참 많이 사랑했음이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내기 위해 명세빈은 평범한 중년 여성 캐릭터를 깊게 연구했다. 말린 어깨와 굽은 등으로 표현한 구부정한 자세, 자연스럽게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모습 등이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가정주부이자 엄마로 살아온 시간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대본 리딩도 여러 번 했다.
극 중 남편의 은퇴 이후를 걱정하다가 공인중개사에 도전하는 설정 역시 많은 중년 여성들의 공감을 샀다. 그는 “그 시기 아내들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뭘 해야 하지?’ 고민한다. 20대 때 카드 영업왕 시절을 보낸 하진이라면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브릿지 염색에 배꼽티를 입었던 20대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들 수겸(차강윤)과 사기를 당해 빚을 지고 돌아온 남편 곁을 묵묵히 지키는 40대가 된 하진에 대해선 “대견하다”고 했다. “하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현명하게 살아낸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도 하진처럼 누군가에게 믿음을 줄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은 캐릭터론 김낙수를 꼽았다. “서울 자가에 살며 대기업에 다니지 않더라도 중년이라면 고민하는 것들 것 다 비슷하다. ‘무엇을 위해 살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나도 40대 초반에 정말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꽃을 배워 직업으로 삼아볼까 생각도 했던 것”이라고 공감했다.
1996년 신승훈 뮤직비디오 ‘내 방식대로의 사랑’으로 데뷔해 내년 30주년을 맞는 명세빈은 연기자로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했다. “젊었을 땐 정말 정신이 없었다. 주연을 급하게 맡기도 했고, 그 시절 현장은 정말 생각할 겨를 없이 바빴다. 지금은 상대와 호흡하면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새로운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들이 정말 재미있다”고 밝혔다.
‘김 부장 이야기’로 용기를 얻은 그는 처음으로 연극에도 도전한다. 본격 무대가 아닌, 평소 다니는 교회에서 여는 작은 행사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축제 때 연극을 해보자는 제안이 있어 도전하게 됐다. 대사를 잊지 말아야 하고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이 크긴 하지만, 새로운 분야라 재미있다. 무대에서 짜릿함을 느끼고 관객과의 호흡이 즐거웠다고 느낀다면 앞으로 연극 쪽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