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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한 올 꿰는데 60번 손놀림... 이런 '실그림'으로 아파트 2채 채웠다

중앙일보

2025.11.30 23:30 2025.11.3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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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자수공예를 '실그림'이라고 칭하는 손인숙 작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실그림갤러리에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정교한 자수작품들이 빈틈없이 전시돼 있다. 손 작가 얼굴과 합성한 작품은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의 봉황 닫집을 실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화사하고 단아하고 정교하다. 그리고 징글징글하다. 60여 년간 추상과 전통을 오가며 자수 작업에만 매달린 손인숙(75) 작가의 작품들을 보는 순간 그랬다. 작가 스스로는 ‘실그림’이라 부르는 이 자수 공예들은 시간·돈·노력 모두를 ‘갈아넣었을 때’만 가능한 경지다. 이런 작품들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300㎡(약 90평) 아파트 2채 벽면을 빈틈없이 채웠다. 실그림갤러리라 부르는 이 공간을 찾는 누구라도 얼얼해져 둘러보게 된다.

지난달 8일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자비에르 살몽 그래픽아트 책임자(부관장급)도 반나절을 그렇게 푹 빠져있었다. 개인적인 내한 일정 중에 지인들과 함께 찾아온 살몽 부관장은 한국 사찰의 꽃문살과 지붕 추녀 등을 재현한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2015년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일부 본 적 있다”면서 “여성들이 이어온 바느질 문화를 현대 회화처럼 재탄생시킨 아름다운 작업들”이라고 했다.

10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바느질과 자수를 익힌 손 작가는 1976년 이화여대 자수과(섬유예술학과) 졸업 후 1986년 개인전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업을 해왔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전의 화제 전시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에 출품한 몇 안되는 생존 작가 중 한명이기도 하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큐레이터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대담하고 독특한 작품 세계”라고 그의 작업을 평했다.

한국 사찰의 문살에 매료돼 이를 사진으로 찍고 이를 자수(실그림)로 구현한 작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1월 8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손인숙 작가 전시공간(실그림갤러리)을 찾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자비에르 살몽 부관장(맨 왼쪽)과 그 일행이 손 작가(오른쪽)의 작품 설명을 듣고 있다. 강혜란 기자
손 작가의 이른바 ‘실그림’은 예컨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나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왕실 의궤인 ‘화성능행도’ 등을 크기도 꼭 같게 수놓는 식이다. 재료가 안료가 아니라 실이고 붓질 대신 바느질로 작업하는 게 차이다. 조선 문무백관 복식의 흉배(품계 표식 가슴장식)나 혼례복의 길상 문양을 단독으로 확대하기도 한다. 팔상도(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으로 그린 불화)를 비롯한 탱화나 책가도·호작도 등 민화도 즐겨 작업한 소재다. 스스로는 “불교·인물화·보자기 등 20여가지 콘텐트(장르)를 다룬다”고 소개했다.

자수 실 한 올은 90㎝. 이를 촘촘히 뜨기까지 손놀림은 약 60회, 총 15분이 걸린다. 40올이 들어 있는 한타래 작업 시간이 600분(10시간)이다. 작품당 수백타래가 드는 만큼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10여명 장인들과의 협업 결과다. 손 작가가 도안을 하고 상세 지침을 주면 자수, 배접, 백골(목공예), 조각, 옻칠, 침선, 매듭, 장석(만듦새) 등 8개 분야 장인들이 이를 실행한다. 그가 “실그림만이 아니라 이를 담은 액자와 여기 달린 매듭공예까지 전체를 봐야 하는 종합예술”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손인숙 작가가 세로 4m 규모의 '고려 수월관음도'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일본 가가미진자에 소장된 14세기 불화를 옮긴 작품으로 4~5명의 자수 장인들과 힘을 합쳐 6~7년에 걸쳐 완성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같은 혼연일체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2000년대 중반쯤 완성한 ‘고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일본 사가현 가라쓰(唐津) 가가미진자(鏡神社·경신사)에 소장된 14세기 불화를 크기도 꼭같게(가로 254㎝×세로 419㎝) 재현했다. 매듭으로 치장하고 여백까지 촘촘히 수놓은 전체 규모는 264.2㎝×511.5㎝에 이른다. 자수 장인 4~5명과 함께 6~7년을 매달렸다. “한국에 왔던 두 번 전시(1995년, 2009년)를 다 봤는데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최고봉이라 여겨졌다. 빛바래고 갈라진 흔적까지 그대로 표현했다”고 했다. 심지어 해진 자국 없는 완전체를 상상한 버전도 만들었다. “두 작품을 나란히 대형 전시장에 거는 게 소망”이라고 한다.

교육자였던 어머니는 “숲을 이뤄놓으면 새와 호랑이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그에게 일렀다고 한다. 30대 이후 전시보단 창작에만 몰두해온 이유다. 결혼 후 두 딸을 길러내는 동안에도 새벽 4시부터 하루 10시간씩 작업을 해왔고 지금도 변함없다. “몰입을 통한 무한 자유의 세계가 창작의 고통이자 기쁨”이라며 “한국 자수 문화가 끊어지기 전에 내 작품을 통해 보존한 게 보람”이라고 했다. 함께 했던 무형문화재급 장인들이 노환과 별세로 떠나면서 최근엔 면사를 활용한 개인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아직도 1400가지 색상의 400㎏ 명주 실타래가 남아 있는데 아쉬울 따름”이라면서다.

손인숙 작가의 작품은 자수공예를 가구와 결합해 마치 나전칠기 같은 문양을 자수로 표현하기도 한다. 각 분야의 인간문화재급 장인들과 협업의 결과로 전통 기법의 보존과 혁신이란 점에서 돋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윤복의 미인도를 '실그림'으로 옮긴 손인숙 작가의 작품에서 얼굴 부분만 확대한 모습. 일반적으로 명주실을 쓰지만 주인공의 머리 가채 부분엔 실제 사람 머리카락을 썼다고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선 문무백관의 흉배 장식을 회화처럼 표현한 손인숙 작가의 실그림 작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기메박물관을 비롯해 유럽에서 세차례 전시했고, 일부 작품은 기증 형태로 해외 박물관에 소장되기도 했다. “현대적이면서도 한국 전통과 관련있는 독보적 예술세계”(올리비에 갸베 프랑식 장식박물관장)라는 해외 전문가의 호평에 비해 국내에선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 “60여년 작품 세계를 이제는 정리하고 알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작 도록을 기획하는 한편, 소규모 팝업 전시를 잇따라 준비 중이다.

첫 단추로 오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종로구 법련 불일미술관에서 불교 관련 15점을 선보인다. 그의 호 예원을 따서 만든 예원실그림재단의 김주희 기획자는 “팔상도 가운데 첫 번째 장면인 ‘도솔래상’(150㎝×233㎝)을 포함해 사찰 문살 작품 등을 모았다”면서 “한땀한땀 명인의 손길이 깃든 자수 공예를 통해 불교 선(禪) 명상의 정신을 곱씹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손인숙 작가의 실그림 '팔상도' 중 ‘도솔래상’(150㎝x233㎝).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으로 그린 팔상도를 자수 공예로 재현한 작품으로 도솔래상은 이 가운데 첫번째 장면에 해당한다. 사진 손인숙



강혜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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