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하고 단아하고 정교하다. 그리고 징글징글하다. 60여 년간 추상과 전통을 오가며 자수 작업에만 매달린 손인숙(75) 작가의 작품들을 보는 순간 그랬다. 작가 스스로는 ‘실그림’이라 부르는 이 자수 공예들은 시간·돈·노력·재능 모두를 ‘갈아넣었을 때’만 가능한 경지다. 이런 작품들로 경기도 용인의 300㎡(약 90평) 아파트 2채 벽면을 빈틈없이 채웠다. 실그림갤러리라 부르는 이 공간을 찾는 누구라도 얼얼해져 둘러보게 된다.
지난달 8일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자비에르 살몽 그래픽아트 책임자(부관장급)도 반나절을 그렇게 푹 빠져있었다. 개인적인 내한 일정 중 지인들과 함께 찾아온 살몽 부관장은 한국 사찰의 꽃문살과 지붕 추녀 등을 재현한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2015년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을 때 일부 본 적 있다”면서 “여성들이 이어온 바느질 문화를 현대 회화처럼 재탄생시킨 아름다운 작업들”이라고 했다.
10세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바느질과 자수를 익힌 손 작가는 1976년 이화여대 자수과(섬유예술학과) 졸업 후 1986년 개인전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업을 해왔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전의 화제 전시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에 출품한 몇 안되는 생존 작가 중 한명이기도 하다.
손 작가의 이른바 ‘실그림’은 예컨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나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왕실 의궤인 ‘화성능행도’ 등을 크기도 꼭 같게 수놓는 식이다. 재료가 안료가 아니라 실이고 붓질 대신 바느질로 작업하는 게 차이다. 팔상도(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으로 그린 불화)를 비롯한 탱화나 책가도·호작도 등 민화도 즐겨 작업한 소재다.
자수 실 한 올은 90㎝. 이를 촘촘히 뜨기까지 손놀림은 약 60회, 총 15분이 걸린다. 40올이 들어 있는 한타래 작업 시간이 600분(10시간)이다. 작품당 수백타래가 드는 만큼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손 작가가 밑그림 샘플과 상세 지침을 주면 자수, 배접, 백골(목공예), 조각, 옻칠, 침선, 매듭, 장석(만듦새) 등 8개 분야 장인들이 이를 실행한다. 그가 “실그림만이 아니라 이를 담은 액자와 여기 달린 매듭공예까지 전체를 봐야 하는 종합예술”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이 같은 혼연일체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2000년대 중반쯤 완성한 ‘고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일본 사가현 가라쓰(唐津) 가가미진자(鏡神社·경신사)에 소장된 14세기 불화를 크기도 꼭같게(가로 254㎝×세로 419㎝) 재현했다. 매듭으로 치장하고 여백까지 촘촘히 수놓은 전체 규모는 264.2㎝×511.5㎝에 이른다. 자수 장인 4~5명과 함께 6~7년을 매달려 빛바래고 갈라진 흔적까지 그대로 표현했다.
결혼 후 두 딸을 길러내는 동안에도 새벽 4시부터 하루 10시간씩 작업을 해왔다는 그는 “몰입을 통한 무한 자유의 세계가 창작의 고통이자 기쁨”이라며 “한국 자수 문화가 끊어지기 전에 내 작품을 통해 보존한 게 보람”이라고 했다. 유럽에서 세 차례 전시했지만 국내에선 작품 가치에 비해 주목 받지 못한 편. “60여년 작품 세계를 이제는 알리고 싶어” 오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종로구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팔상도 가운데 첫 장면인 ‘도솔래상’을 포함한 불교 관련 15점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