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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기적·구로공단·올림픽…그뒤엔 190개국 700만 코리안의 힘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60'<57>]

중앙일보

2025.12.02 12:00 2025.12.0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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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57〉 한민족 네트워크

1963~77년까지 광부 7900명이 독일로 건너갔다. 이들은 주로 루르 탄광지역에서 일했다. 태백 지역 광부들이 파독 전 교육을 받은 후 기념촬영을 했다. [중앙포토]
세계 어디에나 세 나라 사람들은 있다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아일랜드계(주한 아일랜드 대사관에 따르면 7000만 명), 중국계(6000만 명) 그리고 유대계(1300만 명)를 두고 하는 말이다. 특정 민족이 고향 땅을 떠나 이주해 살면서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 민족들이다. 한국인 이주 역사도 이들 민족 못지않다. 현재 한국인 재외동포 수는 190여 개국에 700만 명이다. 재미동포가 260만 명으로 가장 많다. 그다음이 중국(210만 명), 일본(80만 명), 유럽(65만 명) 순이다.

1902년부터 수천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 했다. [중앙포토]
한국인의 해외 이주는 고난과 슬픔의 근대사 속에서 출발했다. 첫 기록은 1902년 12월, 하와이로 떠난 노동자들이 썼다. 이들은 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당시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 노동자 7200여 명의 생활은 열악했다. 하지만 한인회를 만들고,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 후에는 많은 농민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독립운동가와 지식인 등도 모여들면서 무장 독립운동의 거점이 됐다. 이곳 한인들의 고달픈 이주 역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17만여 명의 한인들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나야 했다. 열차로 6000㎞를 이동하는 한 달여 동안 굶주림과 질병으로 아이·노인 등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중에는 많은 노동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강제 동원되거나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간 이가 많았다. 해방 이후 많은 이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6·25전쟁 후에도 생계를 잇고자 해외로 떠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해외 순방 때마다 교민과 특별행사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다. 이들의 고된 생활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육영수 여사(오른쪽). [중앙포토]
1960년대부터 국가의 외화 획득의 일환으로 해외 이주가 활발해졌다. 한국에서 독일로 건너간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대표적이다. 1963~77년까지 독일에 파견한 인력은 약 1만9000명(광부 7900명, 간호사 1만1100명)이었다. 이들은 월급의 80%를 고국에 보내고 남은 20%로 생활 하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이듬해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부부가 이들을 만났다. 행사 도중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이가 많았다.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파독 근로자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당시 연간 5000만 달러 안팎의 큰 액수였다. 어떤 해엔 송금액이 한국의 연간 총수출의 2%에 육박(1973년 한국의 수출총액은 30억 달러)할 때도 있었다. 이들이 보낸 돈은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종잣돈으로 쓰였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해외 순방을 가면 반드시 현지 동포들과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교민 간담회를 해외 순방 일정의 필수 코스로 챙기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별로 없다고 한다. 이런 특별한 행사는 한국인의 해외 이주사와 맞닿아 있다. 가난과 차별 등을 딛고 해외에서 고군분투한 동포들에게 ‘국가가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60년대 중반 이후 재일동포들의 자본이 국내로 들어와 산업 기반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당시 정부는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수출산업 공단 조성을 위해 외자 유치가 절실했다. 1965~79년까지 재일 한인이 한국에 투자한 금액은 10억 달러를 넘었다. 한국계인 나가노 신이치로 교수는 “64년까지 재일 자금 2569만 달러가 한국에 유입됐고, 조국 방문 시 갖고 들어온 ‘포켓 머니’도 상당했다”고 말했다(『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 한국 기업인의 역할』). 구로공단에는 70년대 후반까지 전기·전자, 화학, 비료, 금속 등 200개가 넘는 재일 한인들의 기업이 들어왔다.

재미동포는 260만 명이다. 한인 밀집 지역인 LA의 코리아타운은 70년대 후반부터 조성됐다. [중앙포토]
88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자 해외 한인들의 고국 지원이 이어졌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간 박병헌 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단장. 그는 85년 민단 단장으로 당선된 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525억원을 모금해 한국에 전달했다. 그가 모은 재일교포들의 자금은 체조·수영·테니스 등 여러 종목의 올림픽 경기장 건립에 쓰였다. 외환위기 극복에는 재미교포들이 힘을 보탰다. 70~8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에 건너간 이들이다. LA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져 한 달 만에 100㎏의 금을 모아 본국으로 보내 화제가 됐다. 세탁업에 종사한 이가 많다 보니 한때 LA와 뉴욕시 세탁소의 50~60%가 한인이 운영하는 업소였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후 한국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한류 문화가 세계 곳곳에 퍼지면서 재외동포들의 위상도 함께 높아졌다. 특히 한국인 이민자들 특유의 근면성과 적응 능력, 높은 교육열 등도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2009년부터는 재외동포에게도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권을 줬다.

‘문명충돌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디아스포라들과 고국 정부 간의 밀접한 관계와 협조는 현대 정치의 핵심적 현상”(『미국, 우리는 누구인가』)이라고 했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유대인이나 아일랜드인들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에서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2%(700만 명) 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파워는 막강하다.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는 미 의회와 백악관을 움직인다. 전 국무장관인 키신저, 매들린 올브라이트 등 유명 유대계 정치인도 다수 배출했다. 이들은 특히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한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블랙록 등 주요 금융투자사의 창업주 및 경영진 다수는 유대계다. 유대인의 영향력은 본국인 이스라엘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매년 30억 달러 이상의 군사 원조가 이뤄진다. 또 미국의 중동 정책은 항상 이스라엘을 중심에 두고 펼쳐진다.

해외 교포 네트워크 탄탄한 아일랜드
지난해 12월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한인 경제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중앙포토]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영향력도 상당하다. 19세기 대기근을 겪으면서 아일랜드인 200만 명이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향했다. 현재 아일랜드 인구는 530만 명, 미국에 사는 아일랜드계는 3000만 명이 넘는다. 조 바이든,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이 대표적인 아일랜드계다. 아일랜드는 70년대 유럽의 최빈국이었지만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중 하나로 변모했다. 해외 거주 아일랜드계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해외의 아일랜드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본국과 해외 시장을 연결하는 데 주력했다. 또 아일랜드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고, 해외 기업의 아일랜드 유치도 지원했다.

세계 각국에는 영향력 있는 한국인 출신 정치인, 기업인(한상), 문화·예술인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존재는 단순히 본국을 떠난 이민자 집단이 아니다. 이들의 영향력과 잠재력을 하나로 모은 ‘한민족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거창한 것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다. 재외동포를 대하는 외교부, 특히 해외 공관의 기본 역할이 우선 중요하다. 재외동포 사회와 본국을 동반자적인 관계로 보는 자세다. 2001년 영국에 대사로 처음 나갔을 때 주변에서는 현지 교포 사회와 거리를 두라는 조언이 많았다. 자칫 교민 사회에서 벌어지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교관, 특히 해외 공관에 근무하는 대사 등은 현지 교민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소통하며 실질적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민 사회의 행사에 많이 참여하면서 이들에게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역사에 취약한 젊은 동포들의 교육과 육성에 대한 투자도 있어야 한다. 특히 과학 분야 등에서 해외 우수 한인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의 유치에도 신경써야 한다.

재외동포는 과거 슬픈 이민의 역사 속에 머물러 있는 존재로 남아 있으면 안 된다. 이들은 국가의 외연 확장 가능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전략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정부는 재외동포청을 출범시켰다. 글로벌 한민족을 지원할 수 있는 행정 기반을 마련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issue/11765

※다음은 ‘낙동강 페놀 사건’ 편입니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전 주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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