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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느닷없이 동원돼 계엄군 오명, 국가·국민이 벗겨주길" [12·3 계엄 1년]

중앙일보

2025.12.02 12:00 2025.12.02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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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4일 새벽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회 본회의에서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자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배치됐던 경찰 병력 일부가 이동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2024년 12월 3일. 여느 겨울날과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TV에 나와 “반국가 세력 척결”을 말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그밤 군경 수천명이 계엄 작전에 투입됐다. 이튿날부터 이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계엄군’ ‘내란범’ 낙인이 따라 불었다. 1년이 지났지만 계엄 트라우마는 계속되고 있다.



“군인은 국가, 국민 지킨다는 그 이유 만으로 존재”

국회에 투입됐던 특전사 장교 A씨는 지난달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아서 아직 치료를 받고 있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도 우울증에 시달려 함께 치료 받는다”고 입을 뗐다. 그에겐 ‘국회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존재한다. 그날의 지시는 그런 것이 아니었고 적법하지 않았다”며 “불법 지시였기에 따르지 않았고,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항명일 수 없다는 걸 지시받을 때부터 알았다”고 했다.

A씨를 비롯해 당시 현장의 특전사 대원들은 강제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떠밀렸다. 그리고 모순된 두가지 오명이 동시에 덧씌워졌다. 누군가는 그들을 계엄군이라고, 누군가는 군통수권자 지시에 불복한 항명자들이라 비난했다. A씨는 “군인들이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이어 “부하들을 지키려 불법적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것을 손가락질하고 화살을 군인들에게 돌리는 게 말이 되나. 다시는 이런 흑역사가 반복돼선 안 된다”고 했다.

중사 B씨가 소속된 특전사 707특수임무단은 원래 대북 참수작전 부대다. 계엄 당시 유리창을 깨고 국회의사당 내로 진입한 장면이 생중계됐었다. 그만큼 개인도, 조직 자체도 깊은 상흔을 입었다. 그는 “계엄 직후엔 자다가도 몇번씩 깼다. 이제는 좀 나아졌지만, 당시 얘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부대 차원에서도 한동안 훈련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서 가만히만 있어야 했다. 힘들었다”고 했다.

707특임단은 계엄으로 보직 해임된 단장 김현태 대령을 위한 탄원서를 써야한다는 부대원들과 반대하는 부대원들로 나뉘어 한동안 내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최근에서야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B씨는 “올해 가을이 지나고야 좀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제발 707이 뭐 하는 부대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임무를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계엄군이 본청 출입구를 봉쇄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느닷없는 계엄 동원, 처벌받을까 노심초사”

군 가족들도 지난 1년 함께 고통을 겪었다. 특전사 부사관 아들을 둔 C씨는 그날에 대해 “지금도 공포 때문에 치를 떤다”고 표현했다. 그는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 차림새를 보고 특전사가 투입된 걸 알아차렸다. 아들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더라. 아들이 어딨는지 찾으려고 눈 빠지게 TV를 봤다. 여의도로 달려가 끄집어 내올까 생각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전쟁이 나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작전에 투입됐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느닷없는 계엄에 동원됐다고 하니 걱정이 돼 한숨도 못 잤다”고도 했다.


다행히 아들도 시민들도 다치지 않고 그밤은 지났지만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마냥 자랑스럽던 특전사 아들이었는데, 이젠 애처로운 마음도 함께 갖게 됐다. C씨는 “그 아이들 모두 날아다니는 최정예 전사다. 시민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전 국민이 지켜봤다”며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혹여 처벌받을까 노심초사하는 게 보기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새해 소망은 작전에 투입된 ‘아들들’의 회복과 치유다. 그는 “계엄에 동원됐단 오명을 국가와 국민이 벗겨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의장님은요’ 질문에 아차 싶었다”

군(1600명)보다 더 많이 동원된 건 경찰(3790명)이었다. 내란특검 등 수사와 재판에 이어 헌법존중 태스크포스(TF) 조사까지 개인적·집단적 상처도 크다. 계엄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과장(현 경기남부청 경비과장)이었던 박주현 총경은 지난 1년에 대해 “올해로 30년차를 맞이한 공직 생활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심정”이라며 “지금보다 더 최악일 순 없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최근 조지호 경찰청장 등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 재판에서 재생된 녹음에서 국회 차단을 전달한 인물로 지목돼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박 총경은 “그날의 실상은 다르다”며 “서울경찰청 8층 상황지휘센터에서 오후 10시 54분쯤 전화를 받았다. ‘국회의장님이 5분 뒤에 도착한다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 ‘일단 지침 받자’고 답했다. ‘국회 대표자인 의장님을 막으면, 대한민국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지휘 건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차단 대상’에 의장과 의원들까지 포함돼선 안 된다는 생각에, 지시를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박주현 경기남부경찰청 경비과장이 지난달 27일 경기 수원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 과장은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과장으로 국회 등 상황을 서울청 상황지휘센터에서 지켜보다 국회의장(의원) 출입을 막아선 안 된다는 판단에 지휘 건의를 했다. 김종호 기자
박주현 경기남부경찰청 경비과장이 지난달 27일 경기 수원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은 박 과장이 계엄 1년 소회를 밝히며 눈물을 닦는 모습. 김종호 기자

이후 박 총경은 김봉식 서울청장에게 “(국회에) 의장님 오신다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김 청장은 주변 참모들에게 “의장님 들어간다는데 어떻게 하냐”고 똑같이 묻더니 박 총경에게 “지침을 주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 청장 등 경찰 지휘부 공소장에 따르면, 이후 이어진 참모 회의에서는 국회 계엄해제 요구를 침해하는 헌법 77조 5호 위반 소지가 있다는 데 뜻을 모았고 경찰은 포고령이 내려온 시점까지 약 30분간 국회 출입 통제를 풀었다.

박 총경은 “그때 (원래 지시대로) 다 막으라고 했더라면, 경찰력과 국민 사이의 유혈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찔함을 넘어 오싹하다”며 “계엄 이후에도 대통령 체포에 탄핵 국면 집회 관리까지 트라우마를 씻어낼 겨를 없이 보냈다. 1년 지나고 보니 평생 나만 바라본 가족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국민 전체가 계엄의 희생자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국회 출입문을 지켜야 했던 경찰 기동대원 D씨도 그 밤을 잊지 못하고 있다. D씨는 “무장 군인들이 국회 안에 있는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내가 막는 문을 통해 들어갔다. 제발 아무 일 없으시라고 기도했다”며 “역사의 순간에 있었고, 큰 마찰 없이 나름대로 잘한 거라고 자위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악역이었기에 내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D씨는 그날을 어떤 날로 기억하느냐고 묻자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히지 않는 날”이라고 답했다. 그는 “계엄 경비 경찰관이었다는 부채감과 무기력감에 한동안 TV 뉴스를 못 봤다. 올해 12월 3일엔 시민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자 계엄 선포 1주년 집회에 휴가를 취소하고 일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자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경찰 병력이 출입을 통제하고 그 앞에 시민들이 서 있다. 뉴스1




손성배.김정재.김예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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