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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유물 260점…“프로야구의 산파가 남긴 선물입니다”

중앙일보

2025.12.02 16:33 2025.12.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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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의 장녀 이금희씨(왼쪽)와 차녀 이지현씨가 2일 KBO에서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와 1982년 원년 개막전 행사계획서 등 아버지의 유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프로야구 기틀을 세운 고인의 손때 묻은 유품 260점은 현재 건립 중인 한국야구박물관의 전시 및 연구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김경록 기자
“작은 메모 하나도 쉽게 버리지 않으셨더라고요. 하늘에서도 매일매일 야구를 챙겨보실 아버지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돌아오는 11일은 프로야구의 43번째 생일이다. 1981년 12월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프로야구의 토대가 되는 창립총회가 열렸고, KBO는 이날을 ‘야구의 날’로 지정했다. 과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시상식인 골든글러브를 매년 12월 11일 개최했지만, 2008 베이징올림픽 우승을 달성한 8월 23일 새 야구의 날로 지정되면서 12월 11일은 올드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그러나 올겨울에는 12월 11일의 중요성이 새삼 재조명될 듯하다. 프로야구의 뼈대가 고스란히 담긴 창립계획서 원본을 비롯해 창립총회 회의록, 10개년 계획안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가 최근 KBO의 품으로 돌아온 덕분이다. 유품의 주인은 ‘프로야구의 산파’라고 불리는 고(故)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 지난 9월 숙환으로 별세한 고인의 유족은 일평생 야구만을 사랑한 아버지의 뜻을 기려 고인이 지니던 야구 관련 유품 260점을 기증했다.

프로야구의 생일을 앞두고, 고인의 장녀 이금희(64)씨와 차녀 이지현(62)씨를 2일 KBO 아카이브센터에서 만났다. 아버지의 옛 직장을 찾은 두 딸은 유품을 어루만지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금희씨는 “아버지께선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야구만을 생각하셨다. TV로 늘 한국과 미국 야구를 챙기셨고, 선수들이 어떻게 활약하고 있는지 매일 챙기셨다”고 했다. 지현씨는 “어릴 적부터 집 구석구석 야구 자료가 늘 널려있었다. 아버지께서 메모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투철하셔서 작은 자료까지 허투루 버리시지 않았다”면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프로야구 창립과 관련된 사료가 많이 나왔다. 고인의 유언은 따로 없었지만,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생각해 기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사무총장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의 주역이다. 1931년 경성고무 창업주인 이만수 사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야구와 함께 성장했다. 경동고와 서울대 상대를 거친 뒤에는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하는 등 계속해 야구와 연을 맺었다.

1982년 12월 11일 프로야구 창립총회에서 KBO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이용일(오른쪽). 고인은 1~3대 KBO 사무총장을 지내며 프로야구의 기틀을 세웠다. 중앙포토
고인은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로 일하던 1981년 전두환 신군부의 요청을 받아 서울대 상대 동문인 이호헌(2012년 별세) KBO 초대 사무차장과 함께 프로야구 청사진을 그렸다. 당시 이상주(2023년 작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박영길 롯데 실업야구단 감독 그리고 일본프로야구(NPB)에서 뛰던 장훈 등과 머리를 맞대 초안을 짰다. 1970년대 고교야구의 성공 요인을 바탕삼아 지역 기반의 연고지 체제를 골자로 6개 구단 체제의 프로야구를 탄생시켰다.

이번 기증품에는 KBO리그의 태동을 볼 수 있는 주요 자료가 주를 이뤘다. 1981년 8월 작성된 창립계획서 원본과 같은 해 12월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프로야구 창립총회 회의록 그리고 이듬해 3월 27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거행된 원년 개막전 행사계획서 등 고인이 지니던 대외비 문서가 다수 포함됐다.

1981년 8월 작성된 프로야구 창립계획서.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의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려 최근 기증했다. 김경록 기자
창립계획서 원본에는 프로야구 골격이 고스란히 담겼고, 창립총회 회의록에는 초대 총재 선출 과정 등이 자세하게 기록됐다. 시간대별로 식순을 세분화한 원년 개막전 행사계획서에선 고인의 꼼꼼함이 엿보이기도 했다.

고인의 각별한 야구 사랑은 자녀들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막냇동생을 포함한 삼남매가 아버지를 따라 고교야구를 보며 자랐다는 금희씨는 “선친께서 프로야구 출범을 맡으시면서 정말 많은 야구인들과 만나며 초안을 그리셨다. 집 근처 문구점을 들락날락하시며 중요 문건을 고이 보관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이 간직해온 프로야구 초창기 사진과 자료. 고봉준 기자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과 두 딸. 사진 이지현
금희씨는 이어 “군산상고의 동대문구장 경기가 있는 날이면 부모님 손을 잡고 응원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태극당에서 빵을 잔뜩 사서 선수들에게 선물했다. 또, 고등학교 선수들이 우리 집으로 놀러오기도 했다. 당시 만났던 선수들이 김봉연과 김일권·김성한 등 군산상고 스타였다”고 덧붙였다. 옆에서 언니의 이야기를 듣던 지현씨는 “이만수 감독님과의 추억도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할아버지와 존함이 같아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아버지가 감독님 결혼식 주례까지 맡으시는 등 각별하게 지냈다”면서 “감독님은 매년 명절마다 집까지 찾아오셔서 만남을 이어왔다. 아버지 빈소에서 감독님을 뵈니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고 말끝을 흐렸다.

1980년대 미국으로 잠시 이주했다는 지현씨는 “2년 전 작고한 피터 오말리 LA 구단주의 구단주의 초청으로 아버지와 함께 다저스타디움을 찾았던 일은 당시 미주중앙일보에도 실렸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으셨어도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해외 구단과도 늘 소통하려고 하셨다”면서 “지금 KBO 회관도 아버지의 작품이다. 선친께선 ‘빨리 우리 건물을 짓지 않으면 KBO 후배들이 기약 없이 셋방살이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그만큼 행정적인 부분도 많이 신경 쓰셨다”고 말했다.

1982년 10월 16일 당시 삼성 선수로 뛰던 이만수(왼쪽)의 결혼식 사진. 이용일 KBO 사무총장(가운데)이 주례를 맡았다. 중앙포토
고인의 손때가 묻은 유품은 이제 한국 야구사의 유물로 남아 한국야구박물관(2027년 개관 예정)으로 이관된다. 유품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KBO는 이를 전시 및 연구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두 딸은 “하루는 아버지께서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우리가 ‘야구를 위해 일평생을 바치셨다’고 하니 빙그레 웃으셨다”면서 “아버지처럼 야구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아질수록 한국 야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나중에는 프로야구가 어떤 분들의 노력으로 탄생했는지 한 번쯤 돌이켜 봐줬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었다.



고봉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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