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출근, 주 6일 근무’ 임원 2년 차 SK그룹 김모(49) 부사장은 연말이 불안하다. 4일 임원 인사를 앞두고 온통 ‘칼바람’ 얘기만 나돌아서다. 올해 내내 비용절감, 구조조정 얘기만 듣다 보니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목표다. 김 부사장은 “임원이 임시 직원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며 “연말 기분이 하나도 안 난다”고 털어놨다.
비상경영, 사업재편, 구조조정, 용퇴(勇退), 비용절감, 희망퇴직…. 재계 연말 인사 시즌을 맞아 나오는 얘기다. 3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3일 기준 자산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 소속회사는 3275개로 집계됐다. 지난 8월 1일(3289개) 대비 14개 줄었다. 공정위는 실적이 부진한 회사를 정리한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연말이 ‘수확의 계절’이 아니라 ‘정리의 계절’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 5대 그룹(삼성·SK·현대차·LG·롯데)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사장단 인사에서 정현호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 장(부회장)이 물러났다. 올해 초만 해도 정현호·한종희·전영현 부회장 3인 체제였는데 한 부회장이 별세하고, 정 부회장이 용퇴하며 전 부회장(DS 부문장)만 남았다. 비상기구로 운영하던 사업지원 TF는 사업지원실로 복원했다. 수장을 맡은 박학규 사장은 ‘긴장’과 ‘효율성 제고’ ‘비용 절감’을 주문했다.
SK는 2년째 구조조정의 다른 말인 ‘리밸런싱(재구조화)’에 한창이다. 지난 10월 말엔 예년보다 한 달가량 앞당겨 사장단 인사를 했다. 그룹 컨트롤 타워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인력 규모부터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계열사 중에선 가장 먼저 SK텔레콤이 올해 임원을 약 30% 줄이는 등 칼바람을 맞았다. 3일까지 계열사 임원 대상 퇴임 통보가 진행됐다.
지난달 6~8일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최태원 회장이 강조한 것도 ‘운영 개선(OI·Operation Improvement)’이다. 비용·조직·프로세스 전반에서 비효율을 제거하자는 취지다. 반도체 소재 회사인 SK실트론은 매물로 내놨다. SK온은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받았다.
현대차는 미국발(發) 관세 부과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회사다. 11월 1일부터 인하한 관세(15%)로 소급 적용받지만, 내년 사업 전략의 핵심으로 ‘현지 생산’과 ‘원가 절감’을 꼽는 이유다. 최근에는 북미 시장에서 완성차 부품의 현지화를 늘리라는 지침을 사업부에 전달했다. 현대차 김모(52) 상무는 “그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 원가를 줄인 부분도 전부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며 “원가 절감을 요즘처럼 강조한 때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제철에 이어 현대위아도 퇴직 신청자를 받고 있다.
LG는 최근 그룹 임원 인사에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물러났다. 권봉석 ㈜LG 부회장 1명만 남았다. 2018년 구광모 회장 취임 당시 ‘부회장 5인’이 보좌했으나, 구 회장 중심의 경영이 안정되며 부회장 선임 필요성이 줄었다는 평가다. LG는 임원 승진 폭도 98명에 그쳤다. 2022년 179명이었던 임원 승진자가 꾸준히 줄다 올해 100명을 밑돌았다. LG전자·LG디스플레이는 희망퇴직을 받았다. LG 관계자는 “새해에도 구광모 회장 주도로 인공지능(AI)을 적용해 원가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칼바람이 가장 매서웠던 건 롯데다. 지난달 26일 임원 인사에서 이동우·이영구·김상현·박현철 부회장 4명이 모두 물러났다. 부회장뿐 아니라 전체 CEO의 3분의 1가량(20명)을 바꿨다. 2022년 도입한 본부(HQ) 체제도 폐지했다. 롯데면세점·롯데칠성음료·롯데웰푸드가희망퇴직을 받았다.
삼성전자 인사팀장(전무)을 지낸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은 “‘2인자’격인 부회장마저 칼바람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 조직 전체에 위기의식과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며 “위기일수록 ‘총수 경영’을 강화하고, 진짜 일할 사람만 남기는 인사 기조가 두드러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