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경주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 간 첫 정상회담.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다카이치 총리의 파란 재킷에는 배지 3개가 달려있었다. 일본 각료를 상징하는 황금색 배지, 자민당 상징 배지, 또 하나는 파란 리본이었다. ‘블루 리본’으로 불리는 이 상징물은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 피해자와 가족의 재회를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튿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날 때도 블루 리본을 옷깃에 달고 있었다.
다카이치 총리만이 아니다. 역대 일본 총리는 국제적인 이목이 쏠리는 행사마다 항상 가슴에 푸른색 리본 모양의 배지를 착용하곤 했다. 북한 억류 우리 국민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이 4일 “조속한 남북대화 재개 노력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정부도 보다 절박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일본은 정상외교까지 납북 피해 문제 공론화의 기회로 활용한다. 미·일 정상회담, 한·미·일 정상회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 결과물에 북한을 향해 납치자 문제의 즉각적 해결을 촉구하는 문안이 거의 빠짐 없이 들어가는 건 일본 정부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은 상징물 ‘세송이 물망초’ 배지를 착용한 모습을 찾는 게 쉽지 않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8월 납북 피해자 가족을 만났을 때 세송이 물망초 배지를 단 게 포착된 정도다. 정 장관은 지난 9월 북한에 억류된 최춘길 선교사의 아들 최진영씨와의 면담 자리에서는 이를 착용하지 않았다.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의 세송이 물망초 상징물은 윤석열 정부 때인 지난해 초 만들어졌다. 이전 정부의 산물이지만, 한국 최초의 납북 피해 상징물인 데다 당시 피해 가족과 시민사회계 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의견 수렴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이와 관련, 지난 7월 이 대통령의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일본 기자가 “일본은 북한 문제에 있어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북한 인권 문제에 있어 한국과 일본은 어떤 협력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질문하는 기자의 가슴에 세송이 물망초 배지가 달려 있었다. 한국 역시 자국민 납북·억류 피해로 인한 아픔을 공유하는 만큼 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해석됐다.
다만 당시에도 이 대통령은 우리 국민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일본이 납치자 문제에 관심이 매우 높은 것을 안다. 우리 정부로서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협력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며 “우리가 뭘 협력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노력에 공감한다”고만 말했다.
대통령실이 이날 낸 억류자 관련 입장에는 국군 포로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국방부는 2010년 당시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를 약 500명 규모로 추산했다. 지난달에는 국내 생존 국군포로 6명 중에서 4명(유영복, 이선우, 김종수, 이대봉)이 국군포로 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이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를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보다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이 북한 억류 국민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는 식의 입장을 외신 기자회견에서 밝히고, 하루 지나서야 정부가 해명에 나서는 듯한 모양새는 다른 나라의 납치 피해 해결 노력과 비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억류자 송환을 위해 대통령까지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 2018년 5월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미 정상회담 개최 직전 평양을 방문해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데려왔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들을 직접 맞이했다. 2017년 북한에서 억류 및 고문당한 뒤 혼수상태로 귀국한 미국인 대학생 고(故) 오토 웜비어가 숨지자 트럼프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가의 최우선 책무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통령과 안보 라인이 북한 억류 한국인 현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구조적·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문제”라며 “파장이 우려되는 만큼 대통령실이 납북·억류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과 향후 대책을 제시하고, 억류자 가족과의 소통 등 후속 조치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