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기억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람들의 혼에 망각을 제공할 것이니 (중략) 외부로부터 남의 것인 표시에 의해 기억을 떠올리지, 내부로부터 자신들에 의해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이집트 신화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지적한 '이것'은 문자. 이 위대한 철학자는 오늘날의 통념과 달리 문자를 부정적으로 봤다. 그는 구술과 비교해 문자는 인간의 진정한 기억력을 퇴보시킬 수 있을뿐더러, 사람들을 지혜로워지게 하는 대신 지혜워로워 보이게 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견해는 새로운 기술, 특히 미디어나 소통의 신기술이 등장해 우려를 불러낼 때면 곧잘 인용되곤 한다. 물론 그의 견해가 전해지는 것 역시 다름 아닌 문자를 통해서, 즉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기록된 덕분이라는 역설과 함께다. 신간 『인간지능의 역사』의 한 대목은 이런 얘기와 더불어 그동안 인류에게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면 부정과 거부, 적응과 혼합, 기술 내재화 등 대략 세 단계를 거듭해왔다는 점을 환기한다.
좋든 싫든 인공지능(AI)이 우리 삶에 성큼 다가온 시대다. 이 새롭고 놀라운 기술의 과학과 역사든, 업무와 일상의 활용법이든 새로이 알아야 할 것이 벅차게 쏟아진다. 서울대 AI연구원 인공지능 디지털인문학센터장이자 철학과 교수인 지은이가 쓴 『인간지능의 역사』는 이런 흐름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에 앞서 인간의 지성사부터 되짚는다.
그 초점은 '발견하다' '수집하다' '읽고 쓰다' '소통하다' 등 네 갈래. 이는 곧 책의 각 장의 제목이다. 이를 통해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에 담긴 발견의 희열, 갈릴레오의 망원경과 로버트 훅의 현미경 같은 도구 등장의 의미, 고대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 지식 생산과 활용에 가져온 변화, 인문주의자들과 책 사냥꾼들의 고전 재발견, 편지공화국이라고 불린 유럽 지식인들의 소통 등 이 방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쏟아진다.
그 각각의 특징과 의미를 부각하며 지은이는 기존의 인간 활동과 다른, 디지털·인공지능 시대 지식활동의 특징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시하려 한다. 쉬운 예로 구술문화와 문자 문화, 두루마리와 코덱스, 필사본과 인쇄술 등 '읽고 쓰기' 주요 흐름들은 일방향의 전환이나 진화만이 아니라 지금 시대의 양상과 다시 맞물린다.
구술 문화의 대화적이고 상호작용적인 특징은 실시간 댓글과 공동편집 플랫폼으로, 두루마리의 연속성과 전체성은 하이퍼텍스트와 시각화 기술로, 코덱스의 무작위 접근은 디지털 검색과 연결된다. 특히 인공지능의 등장은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쩌면 인쇄술혁명 이후 가장 거대한 지식 환경의 지각변동"이다. 책은 고대 그리스의 지식 소통이 추구한 알레테이아(진리), 이세고리아(발언에 대해 동등함, 즉 모든 시민의 평등한 발언권), 파레시아(위협이나 권력관계 속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등에 대해서도 그 의미와 이후의 변용 등을 짚는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런 네 갈래 지식활동은 "세상을 '목격'하고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이었다. 한데 "이제 인간은 최초의 목격자가 아니라 AI를 통해 간접적으로 결과를 접하는 '이차적 목격자'가 됐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전통적으로 인간 지성은 주어진 세계 속에 숨겨진 진리나 법칙을 찾아내는 '발견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해왔다"며 "그러나 AI시대의 인간 지성은 점차 '설계자'로서의 면모를 강화하고 있다"고 전한다. 단백질 구조 예측 연구에서 보듯, 인간이 직접 '답'을 찾는 대신 답을 가장 잘 찾을 수 AI 시스템 설계에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는 것.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이처럼 인공지능과 인간의 협력이 지성과 지식, 나아가 인간을 어떻게 '재정의'하는지를 다룬다.
이에 앞서 책의 각 장에도 최근의 새로운 도구나 양상 등이 곳곳에 언급되며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대규모 언어모델에서 보듯 AI가 확률적 추론으로 내놓는 답은 현실세계의 인과관계와 차이가 있다. 과학 실험의 투명한 설명과 재현 가능성과 달리 인공지능은 '불투명한 블랙박스'라는 점도 지적된다. 또 인공지능의 소통 능력에는 인간과 달리 실제세계에서의 구체적 경험이 부재하고, 인간과 같은 의도나 목적의식이 없다.
지은이는 이런 차이를 인식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가 AI의 놀라운 능력에 압도당해 무심코 기계에 인격이나 의식을 투영하려는 인간적 경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인간과 기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냉정하게 직시하도록 돕기 때문"이라고. 인공지능의 능숙한 사용만 아니라, 윤리적 책임을 아울러 '비판적인 해석자'이자 '신중한 검증자'로서 인간의 역할이 강조되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