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호러영화를 싫어한다. 아니다. 싫어한다는 표현은 거칠다. 부드럽게 바꿔보자. 한국인은 호러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 왜 한국인은 호러영화를 선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뭐라 답할까? 하얀 저고리 귀신 나오는 호러가 아니면 딱히 무섭지가 않아서? 맞다. 좋은 대답이다. 한국인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서브 장르 ‘오컬트’가 아니면 호러영화를 그리 겁내지 않는다. 사회가 돌아가는 꼴이 거칠다 보니 웬만한 호러에는 면역이 됐다. 그나마 어린 시절 ‘전설의 고향’을 보다 “내 다리 내놔!”라는 대사에 혼절한 경험이 있어 오컬트 장르는 무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설의 고향’도 연식이 너무 오래됐다. 젊은 한국인은 어떤 호러영화를 무서워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귀신은 나와야 한다. 서양 귀신이라도 나와야 한국인은 극장으로 간다. ‘컨저링’ 시리즈 성공이 대표적인 사례다. 다만,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는 한과 복수라는 감정의 공식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한국 호러영화 전성기가 ‘장화, 홍련’(2003)라는 걸작을 남기고 빠르게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쏟아지면 장르는 쇠퇴하고 관객은 줄어든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한국 호러영화 전성기를 돌려주세요’라고 빌어봐야 소용없다. 아니다. 이젠 좀 빌 때가 됐다. 이유는 천천히 밝히도록 하겠다.
한국이 호러라는 장르를 버리는 동안 할리우드는 오히려 장르의 폭을 넓혀왔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호러는 한국에서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싸구려 마이너 장르였다. 2025년은 다르다. 메이저 장르다. 올해 미국 박스오피스는 호러가 아니면 침몰했을 것이다. 영화 시상식도 빈곤했을 것이다. 넷플릭스부터 생각해 보자. 이 지배적인 OTT 플랫폼의 2025년은 두 편의 호러로 기억될 것이다. ‘프랑켄슈타인’과 ‘기묘한 이야기’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 호러 장르의 출발점’에 가까운 메리 셸리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영화다. 이런 고딕 호러를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다. 올해 11월 7일 넷플릭스 공개 이후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이 본 영화 순위를 격파하고 있다. 내년 오스카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독자 여러분도 이미 봤을 것이 틀림없는 화제작이다. 그렇다면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본 독자는 얼마나 될까.
‘프랑켄슈타인’ 가장 유력한 오스카 후보
‘기묘한 이야기’는 미국 소도시 아이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실험에 휘말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들과 싸운다는 이야기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성공을 거둔 시리즈인데도 한국에서는 유독 인기가 낮다. ‘기묘한 이야기’가 호러에 속한다는 것도 낮은 인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기묘한 이야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어둡고 잔혹해진다. 시청자의 나이가 점점 올라간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더 솔직히 말하라고
? 한국인은 성질이 급하다. 10년 동안 계속되는 시리즈를 따라갈 인내심은 부족하다. 어쩌면 독자 여러분은 ‘기묘한 이야기’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순간, 1시즌 1화를 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사실 ‘기묘한 이야기’는 빈지워칭(Binge Watching·한꺼번에 몰아서 보는 행위)에 어울리는 ‘긴 호러영화’다.
‘기묘한 이야기’는 넷플릭스 영화, 아니 드라마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라면 호기심에 관람을 시작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들은 호러영화 장르라면 일단 치를 떠는 독자들이 과연 찾아서 볼까 근심이 조금 든다. 본격적인 호러영화에서부터 가장 먼 호러영화를 먼저 소개해야겠다. 공포와 잔인함 정도가 덜한 영화부터라는 이야기다. 첫 영화는 국내와 해외의 온도차가 가장 컸던 ‘씨너스 : 죄인들’이다. ‘블랙 팬서’의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마이클 B 조던이 만든 ‘씨너스 : 죄인들’은 한국에서 10만 명도 극장에 불러들이지 못했다. 북미에서는 거의 3억 달러(약 4400억원) 가까운 성적을 거둔 2025년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다.
‘씨너스 : 죄인들’은 1930년대 미국이 배경이다. 갱단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미시시피로 돌아온 쌍둥이 형제가 갑자기 나타난 뱀파이어들 공격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런 영화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조지 클루니와
?틴 타란티노가 주연한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다. 어차피 뱀파이어 영화들은 구성이 비슷비슷하다. 호러 장르를 규정하는 관습에서 완벽하게 탈출할 수는 없다. ‘씨너스 : 죄인들’은 거기서 완벽하게 빠져나올 생각은 없다. 대신 익숙한 형식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단순한 뱀파이어 호러영화가 아니다. 당대 미국 흑인 공동체가 겪었던 차별과 폭력의 역사를 장르 속에 담아낸 영화다. 동시에 그런 차별과 폭력의 기억을 품은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에 대한 예찬이다. ‘씨너스 : 죄인들’은 2010년대 중반 등장한 새로운 미국 호러영화들의 특징을 아주 잘 설명해준다. 호러영화라는 장르를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릇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발은 조던 필이었다. 그가 인종차별을 풍자한 ‘겟 아웃’(2017)을 내놓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호러 장르야말로 사회적 트라우마를 담아내기 좋은 장르라는 것을 젊은 영화감독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웨폰’과 ‘컴패니언’ 역시 올해가 가기 전 놓쳐서는 안 되는 호러영화다. ‘웨폰’은 ‘바바리안’(2022)으로 새로운 ‘조던 필’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잭 크레거 감독의 신작이다. 한화 겨우 50억원인 3800만 달러로 전 세계 3억 달러를 버는 성공도 거뒀다(한국에서는 금방 잊혔다). 내용은 간단하지 않다. 한 마을에서 아이들이 같은 시각 모두 사라진다. ‘웨폰’은 경찰·교사·부모·이웃 등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누가 괴물인가
? 혹시 마을 전체가 괴물인가
?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 조던 필의 영화 ‘놉’(2022)과 ‘어스’(2019)를 결합한 듯한 끝없이 관객이 머리를 쓰게 만드는 지적 롤러코스터다. ‘컴패니언’은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영화다. 모든 것이 스포일러다. 이야기를 잠깐만 하자면,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 젊은 커플이 주인공이다. 문제는 여성의 정체다. 연애 스릴러에서 테크놀로지 호러로 가다가 처절한 생존극으로 끝나는 기묘한 호러 롤러코스터다. 물론 이 영화 역시 그저 피만 흘리지는 않는다. 상당히 흥미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니까, 사랑은 과연 자발적인 감정인가 설계된 감정인가
?
계속 롤러코스터 이야기를 했다. 호러 역사에서 가장 롤러코스터에 가까운 시리즈는
? 서기 2000년에 첫 영화가 나온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다. ‘참사를 피한 자들은 어차피 사고로 다 죽는다’는 설정을 토대로, 귀신이나 살인마가 아니라 우리 주변 모든 물건을 살인 도구로 활용한 시리즈다. 오래된 시리즈라 ‘대를 이어 보는 호러영화’라는 이름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 라인’은 수명이 다한 시리즈를 부활시켜 어떻게든 돈을 벌려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프랜차이즈 되살리기가 아니다. 지난 시리즈가 쌓아온 죽음의 방식을 영리하게 비트는 동시에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오니 매 순간을 잘 살라”는 메시지를 더 폭발적으로 던지는 영화다. 비평가들은 호러에 높은 점수를 주는 법이 없지 않냐고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 라인’의 로튼토마토닷컴 점수는 신선도 92%다. 올해 모든 호러영화가 이 장르에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찬사를 받았다. ‘씨너스 : 죄인들’의 신선도는 97%, ‘웨폰’은 94%, ‘컴패니언’은 93%다. 2025년 호러영화는 비평적으로도 한 단계 다른 차원으로 올라섰다. 몇몇이 즐기던 ‘맛있는 장르’에서 모두가 즐기는 ‘멋있는 장르’가 됐다.
한국 영화, ‘공포 다양성’에 주목할 때 왜 호러영화인가
? 시대가 부르는 탓이다. 호러영화는 사회가 가장 곯아있을 때 가장 잘 작동한다. 냉전기에는 외계에서 온 존재가 공포였다. 외계인 침공 호러가 나왔다. 1960년대 이후로는 사회 자체가 공포였다. 살인마가 등장하는 호러가 나왔다. 9·11 이후 우리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좀비 영화의 새 전성기가 시작됐다. 2020년대는
? 모든 것이 공포다. 사회가 도무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공포다. 역사가 공포다. 인종이 공포다. 계급이 공포다. 위선이 공포다. 공포의 다양성 시대다. 올해 호러영화들은 잔혹한 피칠갑 뒤에 숨은 2020년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것으로 영화계를 정복했다. 한국 영화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도 여기에 있다. 호러영화는 비용이 적고 효과는 큰 대표적인 장르다. 예전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큰 효과를 간절히 바라는 지금 한국 영화에 가장 필요한 장르일 수 있다는 소리다. 재료는 많다. 한국 사회라는 재료다. 충무로 갱스터 액션 영화들은 이미 이 재료로 뽑은 국물까지 다 마셨다. 호러는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김도훈 영화평론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 주간지
〈씨네21
〉 기자, 온라인 미디어
〈허프포스트코리아
〉 편집장을 지냈다.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 합시다』 『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 『낯선 사람』 『나의 충동구매 연대기』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