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지도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한 20년은 된 이야기.
50대 중후반의 여성이 찾아왔다.
고인은 여성의 딸이었다.
딸을 잃은 엄마는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작은 몸이 눈물로 다 젖어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울음에 섞여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혼잣말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힘드시겠지만 진정하세요, 그러다가 어머니도 잘못되시겠어요.”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장례식장에 오셔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고인 분이 좋은 곳으로 편안하게 가게 해야.”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내 입장에선 위로였지만 그 말이 증폭제라도 된 듯 여성은 더 오열했다.
저러다 탈진해서 정말 쓰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장례 사무실 직원들도 서로 눈치만 보았다.
물 한잔 마련할 뿐이었다.
“이거 한 잔 드시고 진정하세요.”
“애가, 너무 어려서…. 장례는 그냥 화장만….”
준비해 온 서류를 보니 고인의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이 상태로 어머니가 ‘상주’ 역할을 하기엔 힘들어 보였다.
장례식장에서 일하면서 정말 많은 죽음과 숱한 사연을 봤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
특히 자녀의 극단 선택일 경우엔 더더욱 조용히 보낸다.
장례를 치러도 부모들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친척이나 친한 지인들이 대리인 역할을 한다.
“너무 힘드신 것 같은데, 다른 가족 분들은 계시나요.”
“저 혼자예요….”
가슴이 내려앉았다.
딸은 엄마에게 너무 큰 짐을 남기고 갔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딸의 짐까지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종종 함께 살던 가족의 유품 정리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다.
가족의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고 상처다.
한 사람의 유품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함께 나눴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 같은 것이다.
그걸 ‘정리한다’는 것은 고인과의 추억까지 ‘버린다’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가족이 직접 하기엔 때론 가혹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에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곧장 추억까지 전부 정리하라고 할 수 있을까.
고인의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였다.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 집에서 어떤 부모가 멀쩡히 유품을 정리할 수 있을까.
딸을 잃은 여성에게 빈소를 차리지 않는 간략한 장례에 대한 절차를 설명해 줬다.
유품 정리는 바로 다음 날 진행하기로 했다.
그제야 정신을 추스른 그녀는 복도를 따라 휘청휘청 걸어나갔다.
유품 정리를 하러 간 현장.
방 2개, 작은 거실 겸 주방, 욕실이 있는 15평 정도의 빌라였다.
꽉 닫혀 있는 문이 보였다.
딸이 마지막 선택을 한 방은 3~4평쯤 되는 공간.
짐이 많지는 않았다.
물건들을 들어내며 파편 같은 ‘단서’들을 읽는다.
침대 배게 옆에는 노트가 있었다.
노트엔 잘생긴 남자와 어여쁜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무슨 연예인 같다.” 함께 간 직원이 무심결에 말할 정도였다.
(계속)
종이들 사이에 무엇이라도 끼워져 있을까 싶어 촤르륵 넘겨보았다.
그러다 ‘유서’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유서엔 빼곡히 고인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