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분석 장비 전문 기업 토모큐브는 지난 2016년 세포를 염색하지 않고도 고정밀 3차원(3D) 형태로 관찰할 수 있는 ‘홀로토모그래피 현미경’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기존 현미경은 독성을 띄는 염색 시료를 사용해야 해 세포를 살아있는 상태로 관찰하기 어려웠다. 살아있는 암세포를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관찰할 수 있게 한 토모큐브의 기술은 현재까지도 글로벌 바이오 업계에서 “바이오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혁신적인 기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토모큐브도 시장 진출 초기 대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낯선 장비를 선뜻 구매해 줄 연구기관과 병원이 없어 사업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꼬를 터준 건 정부였다. 2023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우수 연구개발 혁신제품’에 선정되면서 공공 연구기관에 납품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고성호 토모큐브 부사장은 “기술력이 좋아도 구매처에서 과거 판매 실적(레퍼런스)을 요구해 사업 초기 판로 개척에 어려움이 컸다”며 “정부의 ‘혁신제품’ 제도를 통해 레퍼런스를 쌓은 이후 판매가 가속화됐고, 현재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존스홉킨스의대 등 글로벌 주요 연구 기관에서도 우리 장비를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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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투자 세계 상위권이지만, ‘유니콘’ 고작 2개 늘어
정부의 ‘혁신제품’ 제도가 좀처럼 시장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정부 연구·개발(R&D) 지원 방식의 새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국가다. 내년 국가 R&D 예산은 역대 최대 규모인 35조5000억원으로 편성됐다. 하지만 이 같은 지원에도 성과는 부진하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21년 이후 4년간 미국의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이 229개 늘어난 데 반해 한국은 2개 증가하는 데 그쳤다.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도 자금이 부족하거나 판로를 찾지 못해 이른바 ‘죽음의 계곡’(데스밸리)을 건너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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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2566개 ‘혁신제품’ 지정…“시장 진출 교두보”
기획재정부가 총괄해 16개 부처가 참여하는 ‘혁신제품’ 제도는 이처럼 기술은 있지만, 시장성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내 기술 기업에 정부가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2020년부터 시행됐다. 엄격한 기술 심사를 통과한 혁신제품에 수의 계약, 시범 구매 등 조달 특례를 제공해 공공 조달시장 진출을 돕는다. 최윤억 과기정통부 연구성과혁신정책과장은 “정부가 전략적 구매자, 리스크 테이커 역할을 자처해 민간 기업들도 믿고 혁신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놓아주는 제도”라고 소개했다. 2021년 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공공혁신협의체(OECD-OPSI)는 이 제도를 ‘공공혁신 우수사례’로 선정하기도 했다.
정부는 지난 5년간 총 2566개의 혁신 제품을 발굴했다. 토모큐브 외에 AI 서비스 스타트업 비주얼캠프도 2021년 이 제도를 통해 AI 시선 추적 기술을 적용한 문해력 교육 프로그램을 전국 300개 이상 학교에 도입했다. 이를 밑천으로 멕시코 교육 기술 기업인 옥스퍼드에듀테크에 솔루션 공급 계약을 맺는 등 글로벌 시장 확장에도 나서고 있다. 2023년 혁신제품 기업으로 선정된 AI 망원경 기업 오썸피아도 파주 임진각 전망대와 강원도 정선케이블카 전망대 등 공공 조달에 성공하면서 국내·외로 공급처를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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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정부, R&D 이후 초기 진출 지원도 확대해야”
전문가들은 정부의 R&D 지원 성과가 시장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공공 영역에서 초기 시장 조성자 역할을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서일원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초기 시장 진출 리스크를 나눠진다면 혁신 기업들이 R&D 성과물을 시장에 안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