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11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양측의 군 사상자는 최소 수십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민간인 피해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주민들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사상자는 5만 3000명을 넘어섰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47개월째 접어든 우크라 전쟁
트럼프 종전 노력에도 안갯속
종전 이후 우리 안보에도 영향
‘확장된 전장’이란 절박성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자신이 당선되면 24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불러 종전을 압박했다. 지난 8월엔 알래스카에서 미·러 정상회담을 통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과 달리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달 20일 전쟁 종식을 위한 28개 평화안을 공식 제안했다. 미국은 겉으로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주권을 인정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루한스크 등 동부 영토를 양보하고, 우크라이나의 군대 축소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제한 등이 대표적이다.
논란이 일자, 미국·우크라이나·유럽연합은 지난달 23일 제네바에서 미국이 제안했던 조항의 일부를 수정한 19개 항목에 잠정 합의했다. 핵심 쟁점인 영토 양보, 나토 불가입 등을 뒤로 미루는 방식이다. 이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정치권의 부패를 비판하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못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고 밝혔다. 현재로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 여부는 안갯속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 질서에 미친 파장은 거대하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방식에 따라 한반도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북한은 한국을 주적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이 전쟁에 직접 개입했고, 이는 한반도가 총성이 울리지 않는 ‘확장된 전장’으로 편입됐음을 의미한다. 세 가지 정도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시나리오와 이에 따른 대비가 필요하다.
① 러시아 승리와 국제질서의 붕괴 첫째는 러시아의 실질적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는 경우다. 러시아가 도네츠크 전 지역 통제권을 확보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불가입 공식화와 유럽의 평화유지군이 우크라이나에 상주하지 않는 형태다. 이것은 1945년 이후 국제사회가 유지해온 ▶힘에 의한 현상 변경 반대 ▶주권존중 ▶영토보전 등 규범적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결과다.
전쟁이 이렇게 끝난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불법으로 규정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존립 근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유엔 안보리 국가(미·중·영·프·러)에 거부권을 부여한 건 전쟁 억제라는 공동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인접국가를 침략해 영토를 합병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말리지 못한다면 안보리는 ‘형해화한 기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북한이 이미 러시아에 파병해 직접 참전했고, 중국은 지난 9월 3일 전승절 행사에서 북·러 연대를 사실상 승인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을 양옆에 두고 천안문 망루에 오른 장면은 권위주의 블록의 정치적 상징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이들은 앞으로도 사실상 반미·반서방의 기치 아래 연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런 구조에서 북한은 러시아의 승리를 곧 ‘자신의 승리’로 포장할 것이다. 동시에 반미·반서방 진영의 전진을 선전하며 핵보유국 지위를 정당화하고, ‘핵을 가진 전략국가는 제재를 뚫고 생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화하려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안보 환경에 매우 불리한 구조 변화를 초래한다.
② 불완전한 전쟁 종식 둘째는 현재의 교착상태가 장기화한 채 완전한 종전도, 정전도 아닌 불완전한 휴전상태인 한국전쟁과 유사한 ‘동결분쟁’ 상태에 머무는 경우다. 양측은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 있지만 언제든 파기될 위험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은 전쟁을 억제해온 기존 규범이 무력화됐다는 점에서 국제질서의 구조적 약화를 초래한다. 강대국이 무력으로 인접국가의 영토를 점유하고 버티면 국제사회가 이를 되돌릴 수 없다는 나쁜 선례가 될 수도 있다.
이 역시 유엔 안보리는 ‘전쟁을 막는 경찰’ 기능을 상실한 채, 강대국 간의 진영 대결과 거부권 행사로 마비되는 ‘식물 안보리’ 상태가 될 것이다. 결국, 세계질서는 어느 한 쪽이 국제질서를 재설계하지 못하고 장기 전략적 경쟁과 간헐적 충돌이 상시화되는 회색지대 질서로 이동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어도, 서방의 제재와 압박을 견뎌내고 영토를 확보한 러시아의 사례는 북한, 이란 등 다른 권위주의 국가에 ‘핵을 가진 상태에서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중국은 겉으로는 중재자 코스프레를 하며 ‘냉전 사고 반대’를 외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방의 단일대오가 동결분쟁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균열되는 틈을 타 ‘대안적 국제질서’를 주창하며 리더십 확장을 꾀할 것이다.
북한은 러시아의 승리 서사에 편승해 자신들의 파병을 성공 사례로 포장하고, 러시아와의 군사·경제 밀착을 통해 제재 체제에 구멍을 내는 ‘생존 모델’ 완성을 시도할 게 분명하다.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므로 북한의 지속적인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 정보 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1200만 발 이상의 152㎜ 포탄을 러시아에 공급했고, 이는 러시아 국내 연간 생산량(200~230만 발)의 5배를 넘는 규모다. 분쟁이 동결되더라도 전투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러시아는 무기고를 채우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교류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③ 권위주의 연대의 구조화 마지막으로 전쟁이 장기전에 빠져들면 규범적 국제질서는 붕괴도, 복원도 아닌 ‘정지상태’에 놓이게 된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훼손된 질서가 복원되지 않고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 경우 북·중·러 등 권위주의 연대는 강화될 것이다. 러시아는 전쟁 장기화에 따라 북한의 포탄과 병력, 중국의 반도체·부품·자금에 사활을 걸게 되는 의존 관계가 유지된다. 북한은 이들 재래식 군수품의 장기 공급처로 기능하고, 러시아는 북한에 식량·에너지·원자재·비료·공산품 등을 ‘물자 패키지’로 보상하는 구조를 심화시키는 상호 의존성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해 침공당했다는 식의 논리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자신들의 핵 개발 정당성과 제재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소재로 삼을 수 있다. 동시에 북한은 무기와 병력 지원의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은 식량이나 에너지·비료·공산품 등을 경제난 해소에 활용할 수 있다.
3중 접근의 필요성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떤 식으로결말을 맺든 우리 안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승리는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정당화하고, 동결분쟁은 ‘핵을 가지고 버티면 이긴다’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 또 전쟁 장기화는 북·러 군사협력을 구조화한다. 세 시나리오 모두 북한의 전략적 지위 상승과 대북제재 체제 약화, 권위주의 연대 강화로 귀결돼 한반도의 안보 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한·미동맹 기반의 확장억제 강화, 유럽과의 전략 연대 확대, 중국과 소통 유지라는 3중 접근이 필요하다. 확장억제 강화를 위해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주기를 단축하고, 핵협의그룹(NCG)을 통한 공동 기획·운용 체계를 구체화해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유럽·나토와 안보협력을 확대해 우크라이나 문제와 북핵 문제를 연계하는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권위주의 연대의 구조화를 막기 위해선 중국에 북·러 군사협력 강화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고, 한·중 간 전략적 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한반도가 ‘확장된 전장’이 된 현실을 직시하고 지속 가능한 전략 수립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