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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의 시선] 쿠팡과 기술 봉건주의

중앙일보

2025.12.08 07:24 2025.12.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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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콘텐트3부국장 겸 기업연구부장
‘이런 홀대를 받고도 쿠팡을 계속 써야 하나.’ 지난 열흘간 한국 소비자들이 느낀 건 일종의 모욕감이었다. 퇴사한 쿠팡 직원이 5개월간 가입자 3370만명의 개인정보를 유출했다. 로켓배송 상품을 추천하는 데 필요한 소비자 구매·행동 데이터는 중히 다루는 쿠팡이, 그 데이터를 생산해주는 소비자들의 집주소·실명·연락처가 줄줄 새는 건 전혀 몰랐다.

한국 소비자들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게끔 만들겠다던 김범석 쿠팡 창업자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소비자들은 씁쓸하기만 하다. 이 큰 사고를 치고도 개인정보 유출 아닌 ‘노출’이라 고집하고, 창업자는 그 흔한 사과 한마디 안 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자신감.

탈퇴 못 할 거라며 오만한 쿠팡
소비자는 데이터 헌납 농노 신세
기술 기업과 봉건적 관계 깨야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상품 후기 조작 사건으로 과징금 1600억원을 받은 쿠팡이 ‘공정위가 로켓배송 상품 추천을 금지한다면 지금 같은 로켓배송 서비스는 유지할 수 없다’며 협박성 자료를 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쿠팡은 이런 이상한 방식을 ‘합리성’으로 설명해왔다. 더중앙플러스 기업연구 시리즈 ‘쿠팡연구’에 따르면, 쿠팡 경영진의 핵심 판단 기준은 ‘올바름’이다. 정의나 공정을 뜻하는 게 아니다. 더 합리적이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 자본가다운 올바름(capitalistic correctness)이다. 기업이 효율을 추구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닌데도, 책임에 인색하고 사과에 꾸물대는 쿠팡이라 반감을 산다.

그럼에도 쿠팡 같은 미국 기술기업에게 한국은 사업하기 너무 좋은 땅이다. ‘빨리빨리’ ‘미친 속도’를 좋아하는 문화적 속성에, 땅덩이가 좁아 물류 투자 효율도 뛰어나다. 대기업이란 이유로 대형마트의 새벽·주말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규제는 10년 넘게 그대로다. 경쟁이 무력화된 시장에서 기업은 소비자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개인정보의 가치가 이렇게 저렴한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쿠팡은 과거 정보유출 사건 판례 분석을 끝냈을 것이다. 쿠팡 이전까지 역대 최악의 사례로 꼽혔던 2014년 카드 3사(KB국민카드·롯데카드·NH농협은행) 개인정보 유출에선 1억 명의 실명·주민등록번호·집주소·카드번호 정보가 털렸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 판결에서 기업들에 물린 벌금은 회사당 1000만~1500만원에 그쳤다. 소비자 집단소송에서도 금전적 피해는 없었다며 1인당 위자료 차원에서 10만원씩 지급하라는 게 전부다. 다 합쳐봐야 약 260억원. 이후 유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배상금은 인당 10만원 선에 걸렸다. 대부업자들에게 팔린 정보로 인한 피해는 모두 소비자 몫이었다.

그때도 쿠팡 같은 인재(人災)였다. 용역업체 직원이 카드 3사에 가입자 데이터를 USB에 이관하겠다고 요구하자 암호화도 안 한 원본 정보를 순순히 통째로 내줬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선 주민등록번호·실명 조합 정보를 이렇게 관리해도 된다. 그 정보의 가치는 잘 쳐줘도 10만원이니까.

기업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이렇게 낮은 시장에서 재범이 안 나올 수 없다. 롯데카드는 정확히 10년 후 정보유출 사고를 또 냈다. 정부와 국회의 게으름은 더 큰 사고도 예고하고 있다. 암호화폐거래소 업비트에서 지난달 27일 새벽 54분 동안 445억원 어치의 코인이 해킹됐지만, 현재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엔 거래소에 책임을 물을 근거가 없다. 기술기업의 선의에만 기대는 사회에서 소비자는 언제든 ‘호구’가 될 수 있다.

이번 사태로 쿠팡이 괘씸하지만 차마 탈퇴할 엄두는 못 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데이터 농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중세시대 농노가 영주의 통제 하에 살며 세금을 바치는 대신 영주로부터 경작권을 보장받았듯, 우리는 지금 쿠팡 같은 플랫폼 서비스에 갇혀 내 돈과 시간을 써가며 데이터를 바치고 대신 로켓배송을 받고 있다. 한때는 창의와 혁신, 기업가정신의 상징이었던 빅테크 기업은 이제 독점을 지향하고 공적 영역을 봉건화하려는 ‘기술 봉건주의’의 상징이 돼버렸다(세드릭 뒤랑 『기술 봉건주의』).

AI 시대에 기술 봉건주의는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AI 기업들도 쿠팡처럼 ‘○○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의 지위를 탐내고 있어서다. 이들은 AI 훈련을 위해, AI 서비스 개선을 위해 우리의 데이터를 노린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구조적 변화 없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가 꺼지는 퇴행을 반복할 것인가. 이들 기업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디지털 농노가 아니라 AI 노예로 전락하는 길밖에 없다.





박수련([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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