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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시각각] 쿠팡의 초심, 김범석의 초심

중앙일보

2025.12.0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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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2013년 쿠팡 대표였던 당시 35세의 김범석 창업주가 한국의 스타트업 콘퍼런스에서 강연했다. 창업할 때 하기 쉬운 네 가지 실수로 그가 꼽은 첫째는 ‘모든 것을 잘하려고 한다’였다. “한 가지 핵심 경쟁력을 파악하고 그것에 집중하라”는 조언이다. 쿠팡의 우선순위는 고객 유치다. 둘째 실수, 고객이 아닌 경쟁에 집중한다. 회사의 장기적 성공은 결국 고객이 결정한다고 했다. 매출이 3억원에 불과하던 쿠팡 초창기에 콜센터 직원 100명을 채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쿠팡의 ‘고객’에는 내부 고객인 직원도 포함된다. 그래서 좋은 조건으로 임직원 단체의료보험에 가입했다. 셋째 실수, 선입견 또는 문화적 결정론에 빠지는 거다. “한국 정서상 이런 건 안 돼”라는 조언을 믿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전할 명분이 사라진다고 했다. 넷째 실수, 인력에 맞춰 사업을 운영한다. 인력에 사업을 맞추지 말고 사업에 인력을 맞추라는 조언이다.

옛날엔 야전침대 놓고 현장 지휘
정보 유출에도 창업주는 안 보여
고객감동 벤처 정신 어디로 갔나

2010년 6월 달랑 가방 두 개를 끌고 한국에 온 하버드대 졸업생 김범석은 그해 8월 쿠팡을 창업했다. 창업 2년 반 만에 회원 수 1800만 명, 직원 850여 명, 연 거래액 8000억원, 모바일 1위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초고속 성장했고 결국 한국의 1호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에 등극했다. 김범석 창업주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시절 가장 영감을 준 인물이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다. 그의 가르침인 ‘파괴적 혁신’을 쿠팡은 한국에서 실감나게 보여줬다. 물품을 직매입하고, 외부 용역이 아니라 직접 고용한 인력이 고객 주문 24시간 이내에 배송해 주는 로켓배송을 처음 시도했다. 처음엔 무모해 보였던 물류혁명이 지금은 업계 표준이 됐다. 물류센터를 만든다고 매년 수천억원의 적자를 감수하는 쿠팡을 보며 ‘저러다 언제 망하나’ 하며 혀를 차는 이가 많았지만 쿠팡은 “계획된 적자”라고 밀어붙였다. 김범석의 뚝심과 추진력 덕분이다. 2023년에 흑자 전환을 이뤘고,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2위 고용 기업이 됐다. 지난해 매출(41조원)은 대형 마트 3사인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합계를 뛰어넘었다. 이제는 거대 권력이다.

고객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김범석의 꿈은 현실이 됐다. 337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에도 JP모건이 “쿠팡 이탈 고객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분석할 정도다. 쿠팡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들게 된 데에는 유통산업발전법이 한몫했다. 골목상권을 살리겠다고 기존 유통 대기업의 손발을 묶어 심야와 새벽 유통시장을 쿠팡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자신의 개인정보가 졸지에 공공재가 돼버린 소비자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탈팡’(쿠팡 회원 탈퇴)과 함께 집단소송이 추진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불거진 쿠팡의 개인정보 내부 통제의 문제점과 법적 책임 뒤에 숨는 창업주의 무신경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피해 소비자에게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하고, 재발 방지 대책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쿠팡이 보여준 혁신 성과마저 도매금으로 깎아내리는 듯한 분위기는 지나치다. 한국에서 돈 벌고 미국에 상장한 게 쿠팡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2021년 쿠팡의 미국 상장 당시, 차등의결권 없는 한국의 문제점이 잠시 도마 위에 올랐지만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투자의 종잣돈을 대며 쿠팡을 키운 것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비롯한 글로벌 투자자다.

쿠팡과 창업주의 진짜 문제는 벤처의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점이 아닐까. 고객 만족을 넘어 고객이 ‘와(Wow)’라고 탄성을 터뜨릴 정도의 고객 감동(Wow the Customer)을 추구하던 그 벤처는 어디로 갔는가. 내부 고객인 직원을 그때 그 시절처럼 살뜰하게 모시고 있는가. 물류센터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장을 뛰었던 창업주는 미국에서 지금 뭐하고 있는가. 이 지경이 돼도 창업주가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는 한국 고객의 불만을 가벼이 넘기지 말기를 바란다.





서경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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