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최근 대북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한국 정부에 지금의 대북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대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지만, 본격적 협상 국면에서는 제재라는 ‘채찍’을 활용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8일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케빈 김 주한미국 대사대리는 지난달 25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북한이 계속 협상에 나서도록 하면서 실질적 성과를 내려면 협상력 확보가 중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를 위해 "제재를 유지하고 인권 문제를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김 대사대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압도적 우위에서 북한과 협상하길 바란다"고도 말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북한에 큰 고통을 가하는 제재와 '최고존엄'의 권위와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이는 인권 문제를 대북 협상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수단으로 특정한 셈이다.
여기에는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바가 제재 해제라는 미국의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정은은 지난 9월 한국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우리가 왜 비핵화를 하겠나. 제재를 풀자고 하겠나. 천만에! 천만의 말씀"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는데, 이게 오히려 제재로 인한 고통이 크다는 방증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김 대사대리 역시 이런 취지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를 협상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김정은에 만나자고 러브콜을 보내면서도 제재 유지를 강조한 건 비핵화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 자체를 거부하며 한·미 연합훈련 등을 흔들려는 북한의 전략에 휘말리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주요 기관과 개인에 꾸준히 독자 제재를 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특히 현재 작동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촘촘한 대북제재는 대부분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에 완성됐다. 자신이 마련한 틀 내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를 확실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는 곧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는 '페이스 메이커' 역할만 충실히 해달라는 주문을 간접적으로 내놓은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본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며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활용해 외교적인 성과를 도출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고 짚었다.
한편 주한 미국 대사관은 김 대사대리와 정 장관 간 면담에서 오간 대화에 대한 본지 질의에 "현재로선 공유할 내용이 없다. 상황 변경이 생기면 알리겠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한·미 간에 논의한 사안에 대해선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