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고 또 쫓던 어느 날, ‘입구’가 발견됐다. 핵심 ‘브로커’의 가정부 명의 계좌였다. ‘이용호 게이트 특별검사팀’은 거기서 비롯된 줄기를 캐고 또 캐다가 드디어 ‘저수지’를 찾아냈다. 그곳을 넘나들던 돈은 때로 ‘대통령 차남’의 주변에서 노닐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특검팀은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수사 기한이 도래해서다. 그 2002년의 초봄, “특검법을 고쳐 수사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여당은 단칼에 잘라버렸다.
전담재판부 이어 2차 특검
유례없는 즉흥 정책 남발
역사에 전철 남길까 걱정
수사 보따리를 검찰이 넘겨받았다. 검찰은 그 여당의 방해 공작을 뿌리치고 ‘저수지’를 대대적으로 파헤쳤다. 그 결과 ‘대통령 차남’, 즉 고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의 뇌물 수수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했다.
특검팀은 시한부다. 수사 기간이 빠듯하다. ‘전모 규명’은 불가능에 가깝다. 미제를 상설수사기관이 넘겨받아 마저 풀었던 이유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관련 3대 특검팀 역시 사상 최장 기간을 보장받은 최대 규모였지만 모든 걸 밝혀내진 못했다. 타율적 개점휴업 상태인 검찰을 대신해 이번에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미제를 넘겨받을 태세다. 경찰은 이미 ‘3대 특검 특별수사본부’를 꾸렸고, 인선도 마무리했다. 경찰로서는 초대형 사건을 제대로 다뤄볼 호기이자 수사 역량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시킬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발검(拔劍) 직전 머쓱하게 칼집만 매만질 판이다.
더불어민주당 지휘부가 ‘2차 종합 특검’을 발족시키겠다고 공언하면서다. 3대 특검팀 미제를 한데 모아 수사할 새로운 특검팀을 또 만든다는 말이다. 1999년 특검 제도 도입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선례 없고, 족보 빈약한 ‘첫 사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판국이라서다.
물론 그 선두에는 ‘계엄 공포’를 부활시킨 윤 전 대통령이 있다. 그의 계엄은 너무도 ‘교훈적’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모방범’의 교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고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독을 독으로 없애려는 여당 행태가 면책될 것 같진 않다. ‘특검 릴레이’라는 생경한 아이디어가 현실화하는 순간, 미래의 특검 도입 주도 세력들은 바로 그 선례를 내세우며 2차는 물론이고 3차, 4차 특검팀도 만들자고 주장할 거다. 상설수사기관은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이른바 ‘전담재판부’는 더욱 위험한 발자국이 될 수 있다. 만에 하나 보수 세력이 대오각성해 ‘합리적 보수’로 변신한 뒤 정권과 의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한다면, 그리고 그때 이번 선례를 들이밀며 ‘전직 대통령 전담재판부’ 같은 걸 만들겠다고 우기면 어떻게 대응할 건가.
숙고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국가지도층의 행태를 보면서 『파브르 곤충기』에 등장하는 소나무행렬송충이가 떠올랐다. 수십 마리가 줄을 지어 앞 개체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그 곤충 무리는, 맨 앞의 ‘대장 송충이’가 이끈다. 당연히 무리의 사활을 결정하는 막중한 존재지만 그놈에게는 본능 이상의 지력이나 능력이 없다. 파브르가 그들 무리를 둥근 화분의 테두리로 옮기자 대장은 그저 그걸 빙빙 돌 뿐이었다. 급기야 그놈은 꼬리를 따라잡아 하나의 완성된 동그라미가 형성됐을 때 대장이 아닌 무리의 일원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송충이들은 누가 대장이었는지, 누가 자신들을 사지(死地)로 이끌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앞 놈을 따라 끝없이 집단적 파멸의 길을 걸어야 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踏雪野中去) 함부로 어지럽게 다니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는(今日我行跡) 언젠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김구 선생이 평생 가슴 속에 품었다는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의 시다.
대장 송충이의 길을 걸을지, 선답자(先踏者)의 길을 걸을지 선택하는 건 자유다. 그러나 명색이 나라를 책임지는 집권 세력이라면 뒤따르는 국민과 미래 세대가 나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심사숙고한 뒤 결정을 내리는 게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백년대계는 고사하고 1일 소계도 안 돼 보이는 즉흥적이고 부실한 정책의 남발로는 이룰 수 없는 가치다. 다행히도 전담재판부 도입에 일단 제동이 걸린 이때, 역사와 미래를 위해 충분한 심사숙고의 시간을 갖길 바라본다.
사족을 달자면 3대 특검팀 수사 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면서 한도까지 꽉 채워 수사토록 하고도 모자라 2차 특검팀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현 집권 세력은 20여 년 전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 수사 기간 연장 요구를 단칼에 자른 그때 그 여당의 후신이다. 이참에 과거도 한번 돌아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