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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말만 나온다…'태안 숨은 영웅' 아님 못봤을 절경

중앙일보

2025.12.09 12:00 2025.12.10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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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석의 Wild Korea 〈31〉서해랑길
하늘에서 본 태원 이원반도. 험준한 반도 오른쪽 해안으로 길이 나 있다. 오른쪽 아래는 여섬이다.
충남 태안은 세밑 걷기여행에 제격이다. 서해안 종단 트레일 서해랑길의 109개 코스(1800㎞) 중에서 11개 코스(188㎞)를 품고 있으니 ‘길 부자’라 할 만하다. 서해안 26개 시·군 중 서해랑길 최다 코스 보유 고장이다. 이달 초, 태안 북부에 뿔처럼 툭 튀어나온 이원반도를 걷고 왔다. 벌써 12월이다. 쉼 없이 달려와 맞이한 을사년의 마지막 달,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독이기에 이만큼 좋은 길도 없을 테다.

태안 최북단 이원반도
태안 이원면에 자리한 꾸지나무골해수욕장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서해랑길 72코스가 시작된다. 종합안내판을 보니, 길이 시종일관 이원반도 해안을 따르다가 끝 지점인 만대항을 찍고, 73코스로 이어져 다시 꾸지나무골해수욕장으로 돌아온다.
코리아둘레길 모바일 앱
출발 전에 ‘코리아둘레길’ 앱을 켜고 72코스 ‘따라걷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나오는 실선을 따라가면 되고, 만약 길을 이탈하면 신호를 보내준다. 길을 떠나자 솔바람길 1코스 안내판이 먼저 반긴다. 솔바람길은 태안군에서 조성한 길로 서해랑길과 거의 겹친다.
72코스에 있는 독수리바위. 이 바위 아래쪽에 와랑창이 있다. 멀리 여섬이 보인다.
길을 나서서 완만한 고개를 하나 넘은 뒤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1시간쯤 걸었을까. ‘와랑창’이라는 안내판이 나왔다. 해안 작은 동굴 안에 바다와 이어진 작은 틈이 있는데 약한 파도에도 와랑와랑 큰 소리가 울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직접 가서 들어보고 싶었지만, ‘와랑’이란 고운 이름과 달리 가는 길이 험해서 포기했다.

길을 따라 재미난 우리말 지명을 차례로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꾸지나무골 외에도 어리골·별쌍금·용난굴·큰노루금·붉은앙뗑이 등이 순서대로 나온다. 소리 내어 읽어보니, 책을 필사할 때처럼 마음에 콕콕 박힌다.

용의 전설이 서린 동굴
72 코스 최고 절경인 용난굴. 용이 굴에서 나와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용난굴 이정표를 따라가면, 입구를 장식한 것처럼 화려한 바위가 보인다. 그 안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안쪽 끝 공간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재미난 전설이 서렸다.

두 마리 용이 굴 하나씩을 꿰차고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도를 닦았다. 때가 되자 한 마리가 승천했고, 다른 한 마리는 하늘로 오르던 중 길이 막혀 몸부림치다가 동굴 안에 핏자국을 남기고 망부석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동굴 안에 뻘건 자국이 있고, 굴 앞에 망부석이 있어 신비롭다.
태안 기름유출 사건 이후 3년간 곡괭이로 오솔길을 정비한 차윤천 씨 동상.
다시 고개 서너 개를 넘은 뒤 가마봉전망대에 닿았다. 전망대에는 곡괭이를 들고 활짝 웃는 사람의 동상이 있다. 주인공은 마을 주민 차윤천(75)씨다.

험준한 해변을 따라 오솔길이 잘 나 있어서 궁금하던 참이었다. 이 길의 역사는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에서 시작한다. 당시 태안 해안은 심각하게 오염됐다. 차씨를 비롯한 자원봉사대가 험준한 비탈에 길을 개척하고, 해안까지 접근해 기름을 닦아냈다. 그 후 3년에 걸쳐 곡괭이 하나로 오솔길을 다듬어 꾸지나무골~만대항에 이르는 길을 완성했다. 그의 노고 덕분에 편하게 태안의 절경 속을 걸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자연산 농어회, 살살 녹네
당봉전망대는 제법 널찍하다. 과거 풍어제를 올렸던 곳인데 요즘은 새해 해맞이 행사를 연다. 전망대에 서면 사방으로 전망이 탁 트인다. 서쪽으로는 멀찍이 울도·선갑도·덕적도 등 인천 옹진군의 섬들도 아스라이 보이고, 남동쪽으로 가로림만도 눈에 담긴다. 이원반도의 가장 북쪽 끝에는 입성끝전망대가 자리한다. 해남 땅끝마을에 온 듯, 묘한 감격이 차오른다.
만대항 옆 해수욕장에 찍힌 두 사람의 발자국.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만대항 수산물판매장 트리우드 식당의 회덮밥.
마침내 72코스 종착점 만대항에 닿았다. 수산물판매장 2층의 트리우드 식당에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먼 길을 홀로 걸어서 배가 곯은 나도 반갑긴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았다. 아주머니가 바닷가에 친 그물에서 잡아 왔다는 자연산 농어가 회덮밥에 올라왔다. 살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자 살살 녹는다. 식사 후 커피도 마시며 바다 전망을 만끽했다.

73코스는 걷기가 수월하다. 한동안 도로를 따르다가 우회전하면 숲길로 들어선다. 길은 산허리 임도를 타고 돈다. 인적도 차도 뜸한 길이다. 72코스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졌는지 실감이 난다. 새삼 차윤천씨와 해안의 기름을 닦아냈던 자원봉사대의 노고가 감사했다. 출발했던 꾸지나무골해수욕장에 닿았다. 잠시 딴 세계에 다녀온 기분이다.
서해랑길 72~73코스를 걸은 뒤 몽산포해수욕장에서 만난 일몰.
해가 저문다. 올해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고,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 안 좋은 건 다 버리고 싶지만, 그것도 모두 내가 한 일이다. 지난날의 못난 나에게 화해를 청해본다.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지겠지. 지는 해가 모든 허물을 다 이끌고 저물어 간다. 돌아서는 걸음이 한결 가볍다.

여행정보
차준홍 기자
꾸지나무골해수욕장을 출발해 원점 회귀하는 길은 서해랑길 72코스와 73코스 일부를 걷는다. 거리는 17㎞, 약 5시간 소요. 중간에 점심 먹을 곳은 만대항이 유일하다. 먹거리를 챙겨 가서 걷거나 만대항의 수산물판매장을 이용하길 권한다.
진우석 여행작가 [email protected]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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