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 오후 호주 시드니의 킹조지스트리트에서 지하고속도로인 ‘웨스트커넥스(WestConnex)’로 들어섰다. 시드니 서부의 M4 고속도로와 남서부의 M5 고속도로 사이의 끊어진 구간을 잇는 길이 22㎞의 지하도로로 지난 2015년 착공해 2023년 개통했다.
민자사업으로 총 15조원의 공사비가 투입됐으며 호주에선 가장 긴 지하도로다. 터널 내 천정에는 제한속도와 교통 정보를 제공하는 전광판이 촘촘히 설치돼 있었다. 제한속도는 시속 90㎞이지만 차량흐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
전방에 고장차량이 서있는 상황에선 시속 40㎞까지 제한속도가 낮춰졌다. 터널 벽면엔 흰색의 에나멜 코팅강판패널이 설치돼 지하인데도 달리는 동안 어둡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운전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사이렌 소리나 화려한 조명은 없었다.
터널 속에선 대형트럭도 많이 눈에 띄었다. 퇴근 시간 전이라 차가 막히지 않은 덕에 22㎞ 전 구간을 주파하는 데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지 관계자는 “지하도로 덕에 통행 시간이 크게 단축돼 반응이 좋다”며 “다만 비싼 통행료(편도 약 1만 5000원)가 흠”이라고 말했다.
호주를 비롯해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웨덴 등 여러 나라의 고속도로가 지하로 뻗어가고 있다. 도로용량 증대, 주민 민원 해소, 주변 재개발, 환경 보호 등 목적은 각기 다르지만 지하고속도로가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드니의 경쟁 도시인 멜버른에서도 지하도로 사업이 활발하다. M80 고속도로와 M3 유료도로를 연결하는 길이 6.5㎞의 ‘노스이스트링크 지하고속도로’ 사업이 대표적이다. 2028년 완공 목표로 국내의 GS 건설이 참여 중이며, 사업비만 30조원에 달한다.
또 멜버른 서부와 도심을 연결하는 웨스트게이트교의 교통량 분산을 위한 지하도로(4㎞) 건설사업도 올해 말 완공을 앞두고 있다. 땅 넓은 호주에서 굳이 지하에 도로를 만드는 이유는 주로 대형트럭과 주민민원 때문이다.
GS 건설 현지 법인의 이제우 부문장은 “호주는 물류의 중심이 대형트럭이지만 주거지 부근에선 사고가 잦은 탓에 민원이 상당하다”며 “이 때문에 대형트럭을 아예 지하로 보내기 위해 지하도로 사업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엄격한 환경규제 탓에 지상도로 건설이 어려운 점도 한몫한다.
흔히 고가도로의 천국으로 불리는 일본에서도 지하도로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5년 도쿄에서 개통한 최장 18.6㎞의 ‘야마테터널’이 대표적이다. 도쿄의 가장 내부에 있는 순환도로인 수도고속도로 중앙환상선의 서쪽 구간(신주쿠선, 시나가와선)으로 사업비만 15조원 넘게 들었다.
지난달 11일 오전 하네다공항 부근에서 진입한 야마테터널 역시 화려한 조명이나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위험물 수송차량을 제외한 중대형 트럭과 오토바이도 통행이 가능했다.
전 구간 통과에 30분~1시간가량 소요되지만 지상도로보다는 통행 시간이 짧아 이용차량이 많다고 했다. 수도고속도로의 나카무라 미츠루 토목안전부장은 “처음엔 고가도로 등으로 계획했지만, 주민 반대를 고려해 지하도로로 변경했다”고 말했다.
지하 35m의 야마테터널과 지상 35m 높이에 있는 수도고속 3호선의 고가도로를 연결하는 ‘오오하시 분기점’도 명물이다. 70m의 고저차를 극복하기 위해 분기점을 특이하게 4층의 루프구조로 만들었다. 차량이 두 바퀴를 크게 돌고서는 목적지로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오오하시 분기점은 터널의 환기소 역할도 맡고 있으며, 지상 구조물은 마치 원형경기장을 연상시키 듯 세워져 있다. 분기점 상부에는 공원을 조성해 주민에게 개방했다.
도쿄에선 기존의 고가도로를 지하로 넣고, 니혼바시교 부근을 재개발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노후화된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새로 뚫는 타널 구간은 1㎞가량이다.
수도고속도로의 이시다 타카히로 사업추진부장은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차량이 급격히 늘면서 고가고속도로를 대거 건설했지만, 현재는 노후화가 심하다”며 ”수도고속도로 327㎞ 구간의 고가도로 중 53%가 40년 이상 됐다”고 전했다.
이들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새 고가도로를 짓는 방안은 주민 반대가 심하기 때문에 돈과 시간이 더 들더라도 지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게 수도고속도로측 설명이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와 방식으로 지하고속도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공통점은 철저한 안전 관리다. 웨스트커넥스의 경우 건설 전에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기법을 적용해 화재·교통사고 같은 각종 재난 가능성을 미리 점검하고, 환기시스템 등 대응책을 마련했다.
디지털 트윈은 실존하는 시설 또는 개체에 대한 디지털화된 복제본으로, 현장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상환경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이나 분석을 통해 예측 판단 및 제어를 가능케 하는 기술을 말한다. 국내에서도 여러 곳에 도입되고 있다.
웨스트커넥스 사업에 참여한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의 비나약 딕시트 교수는 “디지털 트윈을 통해 실제 도로와 흡사한 상황에서 화재는 물론 용도별 조명 효과, 터널 내 운전자 시야 변화 등 다양한 실험과 검증을 거쳤다”고 말했다.
웨스트커넥스는 옆 터널로 대피가 가능한 비상통로가 평균 120m마다 설치돼 있고, 터널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도 240m 간격으로 만들어져 대피통로만 모두 190개가량 된다. 터널 내 교통상황을 관찰하고 유사시 비상 대응을 하는 관제센터도 24시간 운영 중이다.
일본의 야마테터널 등에도 최고 수준의 방재대책이 적용됐다. 첨단의 환기시스템 역시 필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웨스트커넥스나 야마테터널 모두 개통 이후 중대 사고는 아직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