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최이정 기자] 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미국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1950~80년대를 관통하며 ‘한국 영화의 얼굴’로 군림했던 그는, 700편이 넘는 작품 속에서 시대의 슬픔과 희망, 여인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낸 전설이었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김지미 배우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며 깊은 애도의 뜻을 밝혔다. 최근 대상포진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 김지미는 194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덕성여고 재학 중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17세의 어느 날, 김기영 감독에게 우연히 발탁되며 인생이 뒤바뀌었다. 그의 데뷔작 ‘황혼열차’(1957)는 이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 배우의 탄생을 알렸다.
대중은 그를 통해 처음으로 ‘여배우란 무엇인가’를 확인했다는 평이다. 세련된 미모, 신선한 감성, 그리고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존재감 등 김지미는 그 시절 한국 영화가 품고 있던 꿈과 열망을 상징하는 첫 ‘아이콘’이었다.
[사진]OSEN DB.
‘별아 내 가슴에’(1958)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장희빈’, ‘불나비’ 등 굵직한 흥행작을 잇달아 선보이며 한국 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불나비’에서의 팜므파탈 연기는 세월이 흘러도 성별과 세대를 초월해 회자되고 있다. 김지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당대 여성 이미지의 변화를 스크린 위에서 이끌어낸 트렌드 세터라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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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거장들이 사랑한 배우이기도 했는데 그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의 이름만 봐도 한국 영화사의 골격이 드러난다.
김수용 (‘토지’로 파나마국제영화제·대종상 여우주연상), 김기영(‘육체의 약속’, 대종상 여우주연상), 임권택 (‘길소뜸’, 대종상 여우주연상) 등이다. 특히 ‘길소뜸’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아낸 시대의 걸작으로, 고인의 절절하면서도 절제된 연가 돋보인다.
고인은 동시대 또래 여배우들이 은퇴를 선택한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배우를 넘어 제작자·영화계 리더로 한국 영화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1985년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한 김지미는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배우로서뿐 아니라 영화계의 ‘방패막이’ 역할도 자처했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에서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영화법도 바뀌어 우리가 하고 싶은 영화가 사라졌다. 배우가 일할 자리가 없어지기에 ‘내가 제작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기도. 그의 책임감과 연대 의식은 많은 후배 영화인들에게 이어졌다. 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영화 생태계를 지키는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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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린 김지미의 삶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더욱 빛났고, 때론 더욱 고단했다. 감독 홍성기, 배우 최무룡, 가수 나훈아와의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그는 대중의 사랑과 관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회고는 늘 영화로 귀결됐다. “많은 영화인들의 손길 덕분에 김지미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지켜준 관객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이 말은 스크린을 떠난 그의 마지막 인사처럼 남았다. 고인은 ‘2014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는데, 당시 여성영화인모임 측은 김지미의 활동에 박수를 보내며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영화인으로서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온, 아름다운 여성영화인”이라며 공로상 수여의 의미를 밝혔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