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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과학 산책] 회기로 85번지 언덕에서

중앙일보

2025.12.10 07:12 2025.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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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한창 꿈 많은 나이 스물한 살, 우린 데모의 함성과 최루탄 가스가 뒤엉킨 교정에서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 나가다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청춘은 자유의 목마름으로 목이 탔다. 그것도 잠시, 학교는 강제로 문이 닫혔고 우린 갈 곳을 잃었다. 암울한 현실에 마음 둘 곳 없던 그 시절, 절친한 친구가 내게 포켓북 하나를 선물했다. 그건 내 청춘의 위안이 된 『수학의 약점』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기까지 나는 홀로 그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거기서 운명처럼 오래된 수학 난제를 만났고 그 길로 곧장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 길은 돌아올 수 없는 외길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길. 그 길에서도 세월의 모진 풍파는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끝없는 고난 속에 산 옛 수학자 케플러에 비하겠는가. 나에게 책을 준 친구는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는 내게 난제를 꼭 풀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에게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김지윤 기자
몇 해 전 회기로 85번지 언덕에서 역시 난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열혈 수학자 몇 명이 나에게 작은 연구실 하나를 내줬다. 그곳은 바로 “불가능을 상상한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고등과학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이론 기초과학 연구기관이다. 이 언덕 위 연구실에 앉아 있노라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칠판에 글씨 쓰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들려온다. 저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이곳에 묻혀 난제와 씨름한 지 두 해가 훌쩍 지났다. 문득 의심이 든다. 문제는 정말 풀릴까? 해는 저물고 나그네 마음이 서럽다. 창밖엔 오늘도 시간을 잊은 채 난제와 씨름하고 있는 젊은 청춘들의 고뇌로 언덕이 붉게 물들고 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책장에서 누렇게 바랜 친구의 책을 꺼내 드니 추억 속 그의 콧노래가 아련히 들려온다.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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