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조 문학상 가운데 최고 권위로 꼽히는 중앙시조대상 제44회 수상작에 이송희(49) 시인의 ‘혀의 세계’가 선정됐다. 중앙시조신인상 수상작으로는 김나비(55) 시인의 ‘밑장’이 뽑혔다. 등단 무대인 제36회 중앙신춘시조상은 ‘거북 익스프레스’를 쓴 최애경(56) 시인에게 돌아갔다.
중앙시조대상은 등단한 지 15년 이상인 시조 시인 중 시조집을 한 권 이상 펴냈으며 한 해 5편 이상을 발표한 이가 후보 자격을 갖는다. 중앙시조신인상은 등단 5년 이상 10년 미만이며, 한 해 5편 이상을 발표한 시조 시인이 후보다. 중앙신춘시조상은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매달 열린 중앙시조백일장 입상자들로부터 새 작품을 받아 그 중 최고작을 가리는 연말 장원 성격이다.
올해 시조대상 수상자인 이송희 시인은 2003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이 시인은 “문학상을 받는다는 건 나라는 존재가 언어로 평가받는 일”이라며 “나와 내 작품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상을 주신 데 대한 크고 작은 책임을 느끼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이 시인은 “늘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성찰하며 시조를 썼다”며 “비유와 상징을 쓰되 정형에 넣는 기쁨을 느끼다보면 어느덧 시조가 되더라. 참 신기했다”고 말했다. 등단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들었을 때 기쁜 심사평은 “흔들리더라도 여전히 참신하다”는 말이다. “작품에서는 고루하고 편안하단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아직 불안하지만 참신하다, 감각적이다. 계속 나아가는 시인이란 말을 듣고 싶다.”
제44회 중앙시조대상과 신인상의 예심은 시조 시인 류미야·박화남씨가, 본심은 시조 시인 김삼환·서숙희씨와 장철환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중앙신춘시조상은 손영희·정혜숙·이태순·강정숙 시인이 심사했다. 세 부문의 시상식은 15일 오후 5시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21층에서 열린다.
중앙시조신인상
밑장 김나비
바람의 손안에 패들이 펼쳐진다
단풍잎 흔들어 스산해진 초저녁
달빛은 체면도 없이 곁눈질이 한창이다
버려질 패처럼 흔들리는 몸짓들
추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숨 가쁘다
후드득, 불안의 순간 굴러야 할 밑바닥
낙장불입, 흔들다 떨어지면 끝장이다
빛(光)으로도 닿지 못할 기억의 저편처럼
쓸쓸한 배후가 되어 나뒹굴다 사라진다
바람은 패들을 접고 또 펼치며
초겨울 손님들을 불러 모으는데
가지 끝 숨긴 밑장을 살며시 꺼내든다
◆김나비
전북 장수 출생. 201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등단. 시조집 『타임슬립』 『혼인비행』
“누군가의 마음 따뜻하게 데우고파”
하나 남은 작은 잎새마저 위태롭게 흔들리는 계절입니다. 세상이라는 계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시인은 타인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며 울어주는 곡비같은 존재입니다. 그늘진 곳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울음과 떨림에 귀 기울이는 일, 그것이 제가 시라는 형식을 빌려 다가가고 싶은 세계입니다.
음지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사람들과 쉽게 밟히고 지워지는 낙엽 같은 존재들의 목소리를 시조라는 구조 속에서 또렷하게 건져 올리고 싶었습니다.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시구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시인이 수행하는 조용한 사회적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상은 저에게 과분한 격려이자,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보라고 건네주신 돋보기입니다. 그 돋보기를 통해 다른 존재의 고통을 확대해 보고, 익숙한 질서를 의심하며, 소멸과 생성의 경계에 숨어 있는 작은 순간들을 더 세밀하게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장의 밑장을 꺼내듯, 아직 쓰지 못한 말들 속에 희망을 담아 한 줄 한 줄 정진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눈여겨 읽어 주신 선고위원님들과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런 장을 마련해 주신 중앙일보사 관계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이 영광을 잊지 않고, 처음의 자리에서 다시 묵묵히 쓰겠습니다.
중앙시조대상·신인상 심사평
현대인의 소외, 생생한 ’혀’ 비유로 형상화 제44회 중앙시조대상 및 신인상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현대시조로서의 위의와 품격을 두루 갖춘 작품들이었다. 심사는 심사위원별로 세 작품씩 엄선하고, 그 중에서 많은 득표를 한 작품을 대상과 신인상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심사 결과, 대상으로 이송희 시인의 ‘혀의 세계’를 선정했다. 현대인의 단절과 소외가 ‘혀’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비유로 잘 형상화되어 현대시조가 갖춰야 할 미학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데 심사위원 모두 동의했다. 다만 시조로서의 정형의 완결미가 다소 흐트러지는 점, 감정의 절제가 약해 서정의 결이 다소 거친 점이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단점이 현대시조의 자기갱신의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일 수 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최종 결정 과정에서 거론된 세 편의 작품 중 김진길 시인의 ‘운탄고도’는 시조로서의 정형성과 유장한 가락이 빼어나나 현대성과 참신성이 약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김남규 시인의 ‘1’은 발상과 비유가 참신하고 발랄하지만, 제목과 표현이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박희정 시인의 ‘더딘 절정’은 담백한 어조로 삶에의 기대와 좌절의 과정을 섬세하고 곡진하게 그렸으나, 발상과 호흡이 다소 상투적이고 단조롭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신인상으로는 김나비 시인의 ‘밑장’을 선정했다. 가을의 서정적 풍경을 화투판의 광경에 빗대는 과감함과 참신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도 “낙장불입, 흔들다 떨어지면 끝장이다”와 같은 해학의 옷을 입을 수 있는 건 시인이 말을 부리는 재주를 가늠하게 한다. “가지 끝 숨긴 밑장”에서 보듯,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는 점도 심사위원들이 ‘밑장’을 신인상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은 이유이다. 수상자에게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고, 내년에는 모든 시인들이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시조 시단을 더욱 풍성하게 빛내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김삼환·서숙희·장철환(대표집필)
중앙신춘시조상
거북 익스프레스 최애경
몸 하나가 집인 거북이를 알고 있다
다리가 짧아서 하루는 높고 멀지만
이삿짐 사다리차에
고층이 특기라지
딱딱한 등껍질에 냉장고가 실리고
수입산 바닥재엔 뒤꿈치도 무거웠다
밤에야 뉘어보는 몸
꿈조차 등이 휘는
반쯤 낮은 방 한 칸, 더 낮은 오늘이지만
물소리 모이는 방 여기가 출발이지
느려도 단단한 생을 업고
바다로 가는 중이다
◆최애경
대구 출생. 중앙시조백일장 2025년 1월 차상. 2023 노산시조백일장, 청풍명월 전국시조 백일장 입상
중앙신춘시조상 심사평
‘거북이 짧은 다리’에 도시 노동자 애환 담아 중앙시조백일장 한해 결실이 담긴 두툼한 파일 속에는 매월 입상자들이 땀과 눈물로 직조해 낸 100여 편의 작품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명의 심사 위원이 긴 시간 토론을 나눈 결과 최애경의 ‘거북 익스프레스’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뽑아 올린 당선작은 각 수의 유기적 연결성과 선명한 시상을 정형미학의 틀 안에 잘 녹여내고 있다. 낮고 느리지만 “단단한 생을 업고” 나아가는 거북, 그들 삶의 지속성이 생태계를 떠받치는 근본임을 드러낸 시적 발화도 돋보였다. “다리가 짧아서”로 집약되는 메타포로 도시 노동자의 애환을 담아냄과 동시에, “물소리 모이는 방”이라는 출발지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희망적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어 깊이 공감했다.
맨 나중까지 남은 나정숙의 ‘혹등고래’는 세련된 표현미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형상이 미약했으며, 은결의 ‘저물녘의 시’는 중첩된 시어들이 흠이 되어 내려놓았다. 그 외 배경숙의 글들도 눈여겨봤다. 더 좋은 글로 다시 만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