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등 첨단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금산분리 규제 완화’가 임박한 가운데 ‘특정 대기업을 위한 맞춤형 완화 아니냐’는 논란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를 주재한 자리에서 “‘금산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실질적 대책을 거의 마련했다”고 밝혔다.
재계의 이목이 쏠린 대목은 ‘증손회사 지분 100% 보유 의무’를 50%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안이다. 공정거래법 18조에서 정한 이 요건에 따라 일반 지주회사 구조인 기업의 손자회사가 회사(증손회사)를 만들거나 인수하려면 그 지분을 전액 자기 돈으로 확보해야 한다.
SK하이닉스·LG에너지솔루션·GS칼텍스 등 주요 대기업 손자회사들이 모두 이 조항에 발이 묶인다.
━
AI가 쏘아올린 규제 완화론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용인 팹(공장)을 짓는 데에만 600조원의 투자가 필요하다”며 “AI(인공지능) 시대 투자 규모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현행 규제 아래에서는 600조원을 전부 자체 자본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애로를 피력한 셈이다.
실제 이날 SK하이닉스는 자금조달을 위한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발행 가능성에 대해 “자기주식을 활용한 미국 증시 상장을 검토 중”이라고 공시했다. ADR은 외국 기업이 기존 주식을 미국 예탁기관에 맡겨 발행한 증서로, 미국 투자자들이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어 외국 자본을 보다 쉽게 유치할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자사주 중 ADR 상장 가능한 물량은 2.4%로, 9조원 상당이다.
업계에서는 금산분리 요건이 완화할 경우 SK그룹이 가장 수혜를 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SK그룹은 지주사인 SK가 중간 지주사인 SK스퀘어를 지배하고, SK스퀘어는 SK하이닉스의 대주주다. SK하이닉스가 지주사의 손자회사다. 이번 규제가 완화하면 SK하이닉스는 지분을 50%만 가지고 외부 자본을 유치해 특수목적법인(SPC)룰 만들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 SPC가 공장을 짓고 생산시설을 SK하이닉스에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AI와 반도체 사업, 손자회사 구조를 동시에 가진 SK하이닉스 입장에선 말 그대로 ‘활로’가 트이는 셈이다.
━
“원포인트 특혜?” vs “산업 전체 봐야”
이에 따라 ‘원포인트 특혜 집중’ 논란도 적지 않다. 앞서 주병기 공정위원장이 “(금산분리 완화는)몇 개 회사의 민원일 뿐”이라고 선을 그은 것도 이런 논란을 부채질했다. 다만 글로벌 시장의 현실을 고려하면 지금같은 금산분리 규제는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외부 자본을 유치해 위험을 분산하는 합작 방식이 이미 첨단산업 투자 방식으로 일반화했기 때문이다. 대표 사례가 미국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와 기술기업 오라클, 일본 투자회사 소프트뱅크가 손잡고 차세대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5000억 달러(약 736조원)라는 천문학적 돈을 함께 댔다. 초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지분 나누기’가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최승재 세종대 법학과 교수는 “반도체만 봐도 웨이퍼·노광장비·소재·물류로 이어지는 대규모 공급망 산업”이라며 “첨단 산업 규제 완화의 수혜는 특정 기업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십 년을 내다보고 선제 투자해야 하는 첨단 산업의 ‘쩐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건 한 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 기술 주권과 경쟁력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국경제인협회 역시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에 제출한 자료에서 “지주사 계열사 지분율을 규제하는 국가는 사실상 한국 뿐”이라며 “4차 산업혁명 시대 인수합병(M&A)이 부진한 이유가 이런 구조적 제약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예 규제 완화를 적용받는 산업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신사업 전환(pivot)은 모든 기업의 생존 전략”이라며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규제처럼 여러 조건이 붙는 부분적 완화보다 전 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첨단 산업 자금 조달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