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결국 배수진을 쳤다. 최장 ‘59박60일’ 간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계획대로 강행한다면 내년 2월까지 필리버스터 대치 정국은 불가피하다. 야당이 법안 저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한 경우는 있었지만 비쟁점 법안 전체를 필리버스터하는 것은 처음이다.
복수의 국민의힘 의원은 10일 중앙일보에 “필리버스터 대상에 오른 59개 법안 중 우리 당이 발의한 법안이 30개가 넘는다”며 “오죽하면 우리 법안까지 반대하겠느냐. 배수진이자 고육지책”이라고 했다. 전날 첫 필리버스터 주자였던 나경원 의원도 “국민의힘은 (첫 안건인) 가맹사업법에 관해 찬성 입장”이라고 운을 뗀 뒤 토론을 시작했다.
이런 고민은 9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이날 필리버스터를 확정 짓기 위한 의총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반헌법적 ‘8대 악법’을 완전 포기할 때까지 가용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저지투쟁을 하겠다”고 밝혔다.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왜곡죄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제 도입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 대상 범위 확대 ▶혐오 표현 현수막 제재 ▶유튜버 징벌적 손해배상제 ▶필리버스터 중단 요건 완화(국회법 개정안) 등 국민의힘이 규정한 ‘8대 악법’ 저지를 위해 전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에 나서겠단 뜻이었다.
그러나 송 대표의 발언 직후 비공개로 전환된 회의에선 찬반 의견이 분출했다. 한 중진 의원은 첫 필리버스터 안건이 ‘가맹사업법’이란 점을 짚으며 “법안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지면 소상공인들이 돌아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해당 법안은 가맹 본부의 불공정 행위를 막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자 다른 의원은 “법안을 하나하나 가려가며 대응할 상황이 아니다”는 취지로 반박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 개최를 앞두고 쟁점 법안 처리를 연기하기로 한 것을 놓고서도 한 의원은 “‘민생에 발목 잡는다’는 프레임을 만들기 위한 의도”라고 우려했다. 다른 의원도 “민생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신중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한동안 우려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송 원내대표는 “의총 전에는 찬성 의견이 많았는데 다른 얘기들이 나오니 나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그러자 일부 의원들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면 안 된다”며 지도부에 힘을 실었다. 한 영남 지역 의원은 “찬반 의견이 비등했지만, 입법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지면서 의견이 일치 됐다”고 했다.
대다수 의원들은 이후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개별 법안에 대한 찬반 의견 대신 이재명 정부에 대한 비판 메시지를 내는 것으로 절충점을 찾은 뒤 송 원내대표에게 최종 판단을 위임했다. 이후 송 원내대표도 “필리버스터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지난 10월에도 ‘70박71일’ 필리버스터를 예고했지만 여야 협상이 타결되며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이번 역시 여당의 ‘입법 독주’를 막을 뾰족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59박60일’ 필리버스터로 협상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는 판단이 깔렸다. 필리버스터는 국회법상 개시 24시간이 지나면 재적의원(298명) 5분의 3인 179명 이상의 동의로 강제 종결이 가능하다. 국민의힘으로선 범여권이 180석을 차지한 의석 구도에서 8개 쟁점 법안에 대해서만 필리버스터를 할 경우 입법 저지는 최대 8일까지로 제한된다. 원내 관계자는 “60일 동안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민주당으로선 큰 부담”이라고 했다.
또 민주당이 이달 중 필리버스터 요건을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을 예고한 만큼, 이번이 마지막 저항 기회란 절박감도 작용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국회법 개정안은 무제한 토론 중 회의장에 있는 의원 수가 재적 의원 5분의 1(300명 중 60명)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이를 중단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야당의 필리버스터까지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으로, 다음 기회는 없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야 협상 국면이 장기화될 경우 “민생을 발목 잡는다”는 역풍에 대한 걱정도 크다. 당장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10일 성명서를 통해 “민생을 정쟁의 인질로 잡겠다는 노골적인 정치 행위”라고 규탄했다. 일시 봉합 된 내부 동요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11일 예정된 본회의 첫 안건으로 예정됐던 ‘특정금융정보법 개정안’이 상정될 경우, 이날 국민의힘 필리버스터 주자인 강민국 의원은 자신이 발의한 해당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해야 할 상황이다.
강 의원 측은 “1년 넘게 공 들였던 법안”이라며 “사리에 맞지 않은 부분 같아 당에 순서 조정을 요청했다”고 했다. 다만 여야 원내대표가 10일 오후 협상을 통해 11일 본회의에서 형사소송법과 은행법, 경찰간 직무집행법 등 3개 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면서 특정금융정보법 개정안은 빠졌다. 국민의힘은 세 법안에 대해서도 모두 필리버스터를 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