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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4명에 가업 물려줬다…건물주 된 빚쟁이 아빠의 '한 수'

중앙일보

2025.12.10 12:00 2025.12.1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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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인생 후반전, 알면 알수록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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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직장은 ‘도로 위 공기업’이라 불리는 한국도로공사였다. 직원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켜주는 건 물론, 자녀들 학자금도 다 대줄 정도로 안정적이고 좋은 회사였다. 회사의 이런 혜택은 아이가 넷인 나 같은 사람에게 결코 무시 못 할 복지였다.

" 제 업무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요금 징수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하이패스 단말기가 도입되면서 사람의 업무가 기계로 대체되는 게 보이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 일자리가 없어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던 와중에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졌다. 회사는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대규모 인원 감축 얘기가 나왔다. IMF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사라질 일자리라 생각했다. 무작정 버틸 게 아니라, 차라리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다른 일을 찾자고 결심했다.
ㅏ전북 부안군 진서면에 위치한 슬지제빵소. 김갑철 슬지제빵소 창업주가 간판을 들어보이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그렇게 41세 젊은 나이에 희망퇴직을 했다. 아직 중학생·초등학생인 네 아이를 생각하면 한시도 쉴 수 없었다. 당시 양계장에서 일을 배우던 아내를 따라 본격적으로 양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 아내가 마침 양계를 배우고 있었는데, 닭이 성장 속도가 빨라 금방 출하할 수 있어 현금이 잘 돈다고 하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어요. "

나는 소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의미의 신조어) 투자를 감행했다.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과 위로금, 1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며 모아놓은 여윳돈은 물론, 은행 대출까지 끌어다 닭 10만 마리를 구했다. 여러 농가가 공동으로 닭을 키우는 대규모 농장에 내 자리를 마련하고 양계를 시작했다.

거래처가 든든한 대기업인 하림이라 판로 걱정도 없었다. 첫 몇 개월간 월 500만원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온다 싶었다. 쑥쑥 자라는 닭들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만큼 뿌듯했다.

그런데 1999년 초겨울, 조류독감이 창궐했다. 보통 닭은 35일 정도 키우면 출하하는데, 33일 된 닭들이 픽픽 쓰러졌다.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퇴직 2년도 채 안돼, 나는 닭 10만 마리를 고스란히 폐사시켜야 했다.

"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죠. 밤새 한숨 못 자고 새벽마다 양계장에 달려가 쓰러진 닭들에게 약도 주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지더라고요. 엉엉 우는 게 아니라 눈물이 몸속에서 그냥 줄줄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어요. "

닭들을 다 땅에 묻고 양계장을 찾았더니, 닭들이 뛰놀던 자리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정리해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이제 인간 김갑철(68)에게 남은 거라곤 처자식, 그리고 빚 7000만원뿐이었다. 희망퇴직에 이어 양계장 사업이 망하자, 나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온 가족이 고통을 겪게 됐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슬픔과 괴로움에 빠지는 것조차 감정의 사치였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당장 일거리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 제 명의 재산은 갤로퍼 딱 한 대가 남았거든요. 아내랑 이걸 타고 ‘투자금 없이 여섯 식구 먹고살 일거리’를 찾으러 전국을 다녔어요. 하 참, 그때 그 절박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
우리밀과 우리팥으로 만든 슬지제빵소의 찐빵. 슬지제빵소 인스타그램 캡처

(계속)
갤로퍼를 탄 채 아내와 며칠을 헤매고 다녔을까. 어느 날 허름한 찐빵집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유난히 추운 겨울, 조그만 가게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몽실한 찐빵을 보니 문득 어릴 적 모내기를 하다 새참으로 나온 찐빵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만 보니 종잣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밀가루와 팥만 들어가는 새하얀 찐빵은 다른 길거리 음식보다 훨씬 깔끔하고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전국 찐빵 맛집을 돌며 어깨너머로 반죽 만드는 법, 팥 삶는 법 등을 익혔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자식 이름을 내건 ‘슬지네 찐빵’을 시작했다.

이 찐빵은 나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꿔놨다. 이때 시작한 찐빵집을 26년째 이어오며 자식 넷과 함께 가족 사업으로 일궜다. 전국 각지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우리 찐빵 가게에 찾아오고, 나는 ‘철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유명해졌다.

" 개업식도 없이 초라하게 가게를 시작하던 날, 제 인생에 이런 성공이 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든 빚 갚고 우리 식구 먹고살 걱정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전부였거든요. "

투박하고 저렴한 서민 간식인 찐빵으로 어떻게 빚더미에서 벗어나 대를 잇는 가업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네 자녀와 함께 탈 없이 가족 사업을 일궈온 노하우, 자식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준 뒤 내가 찾은 마지막 직업까지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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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joongang.co.kr/article/25384291



박형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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