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인재 부족이 심각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공지능(AI)·클라우드·빅데이터 등 핵심 분야에서 향후 5년간 최소 58만여 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11일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는 ‘이공계 인력부족 실태와 개선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김인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연구위원에 의뢰한 조사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다. 보고서는 “2029년까지 AI·클라우드·빅데이터 등 신기술 분야에서 중급인재가 29만2000여명, 고급인재는 28만7000여명 가량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이를 합하면 총 57만9000여명에 달한다.
AI 투자가 폭증하는 흐름을 고려하면 이마저도 ‘보수적 추정’이라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AI 산업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이를 감안하면 58만여명의 부족인원은 최소치”라는 것이다. 실제로 내년 마이크로소프트(MS)·아마존·구글·오라클 등 글로벌 빅테크가 쏟아붓는 AI 투자액만 5200억달러(약 765조원)에 달한다.
신기술 인력난의 배경에는 뚜렷한 ‘의대 쏠림’이 있다. 자연계 상위 1% 학생 가운데 의대 진학 비중은 76.9%에 달한 반면 일반 이공계 학과 진학은 10.3%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김 연구위원은 “전공 선택 단계에서 이탈이 시작되고, 이공계 내부에서도 빠져나가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했다. 실제 카이스트(KAIST)에서는 2021~2023년 사이 의·치대 진학을 위해 자퇴한 학생이 182명에 달했다.
보상 수준이 낮다는 점도 이공계 인재 확보의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보고서에 다르면 학위 취득 10년차 이공계 평균 연봉은 9740만원, 해외 취업 시 평균 연봉은 3억9000만원, 국내 의사 평균 연봉은 3억원 수준이다. 같은 최상위권 인재라도 경제적 보상이 3~4배까지 벌어지는 셈이다. ‘반도체 석학’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세계 최고 인재를 확보하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야 한다”며 “형평성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기업이 진짜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연봉과 처우에서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안정성도 이공계 기피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따르면 이공계 신규 박사 30%는 미취업, 임시직 비율은 21.3%에 달한다. 반면 의사는 전 연령대에서 사실상 100% 취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만족도 역시 AI·로봇 분야는 71.3%로 의사(79.9%)보다 8.6% 낮았다. 이 때문에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한국 두뇌유출지수는 2020년 28위에서 2025년 48위로 하락했다.
‘과학기술 인재 유출 방지 및 유치 대책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 민간위원장을 맡은 경계현 삼성전자 고문도 첫 회의에서 “한국에서 키운 젊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외국으로 많이 떠난다”며 “한국은 과학기술인에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종명 대한상의 산업혁신본부장은 “‘스타 과학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처우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국가과학자 인정 제도’ 활성화나 ‘융합 연구 허브 구축’처럼 정부 차원의 지원을 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인 최초로 유네스코 메달을 수상한 진정일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이공계 기반이 더 취약해지기 전에 대응책을 서둘러야 한다”며 “젊은 인재들이 가고 싶어 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어내야 이공계가 다시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