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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의 시선] 파이어국을 꿈꾸며

중앙일보

2025.12.11 07:26 2025.12.1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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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 경제선임기자
1997년 2월 신혼여행 때 환율은 달러당 860원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태국에서 시작한 외환위기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거쳐 아시아 전역으로 번졌다. 한국 정부는 “외환보유고가 300억 달러를 넘는다”고 발표했고,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제임스 월펜슨 세계은행(IBRD) 총재 등이 잇따라 “한국 경제는 건전하다”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96년 경상 적자가 244억원에 달하고 단기외채도 1500억 달러를 넘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금융시장이 붕괴했다. 12월 23일 달러 가치는 한때 1995원까지 올라갔다. 시중금리는 31%를 넘어섰지만, 외국인들은 한국 채권을 단 한 장도 사지 않았다. 이후 재계 30대 그룹 가운데 11개가 사라지는 혹독한 겨울이 이어졌다.

달러 환율 1500원 걱정하지만
매년 1000억달러 벌어 해외 투자
미래엔 금융소득이 효자 될 수도

달러 환율이 치솟는다는 것은 원화 가치가 곤두박질친다는 얘기다. 1000원짜리 물건 수출 가격이 1달러에서 0.5달러가 되는 셈이다. 싸게 물건을 내다 팔고,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여 빚을 갚았다. 환율은 1200원 선에서 안정됐고, 10년 후 900원 선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2007년 4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한 금융 위기가 해를 넘기며 전세계로 번진 것이다. 2008년 7월 달러 가치가 1000원을 넘나들자 점심때만 되면 어디선가 달러가 풀렸다. 여의도 금융가에서는 “거래량이 줄어든 시간에 외환 당국이 개입하는 것”이라며 ‘도시락 폭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600억 달러를 넘던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까지 줄어들고 위기가 유로존까지 번지자 외환 당국도 손을 들었다. 그해 10월 달러 환율은 다시 1500원을 넘어섰고, 이듬해 3월에는 1598원을 찍었다. 외환위기의 악몽 탓에 환율 추이를 1분 단위로 점검했다. 미국에서 불이 났는데 왜 달러는 강세고 원화는 약세인걸까. 달러 불패에 입맛이 썼지만, 든든히 쟁여둔 외화 덕에 우리나라는 큰 무리 없이 세계금융위기를 헤쳐나갔다. 달러 환율 역시 2022년 상반기까지 1200원 안팎에서 움직였다.

최근 달러 가치는 1470원으로 급등해 세번째 1500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번 원화 약세의 이유는 많이 다르다. 외환위기 때는 물건을 팔아 생긴 적자를 외채를 내 메우는 상황이었다. 빚으로 돌려막기가 막히니 파산한 것이다. 세계금융위기 때는 경상수지가 흑자였지만 전세계가 달러를 찾다 보니 환율 급등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물건을 팔아 번 돈을 해외에 투자하느라 일시적으로 달러가 부족해진 상황에 가깝다. 실제로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990억 달러에 달했고, 올들어 9월까지 추가로 8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들어 9월까지 해외 금융자산이 768억 달러 늘었다. 실제로 일반정부(국민연금)가 지난해의 두배인 245억 달러, 비금융기업(서학개미)이 74% 늘어난 166억 달러어치의 해외주식을 추가로 샀다.

정부와 한은은 고환율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이 내수 부진, 고용·투자 감소로 이어져 경기 침체가 오는 것을 가장 우려한다. 11일 미 연준(Fed)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음에도 달러 강세는 여전하다. 하지만 주머니가 비어 나타나는 고환율이 아니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해외에서도 큰 문제라고 보지 않는 것 같다. 국가 부도 위험을 평가하는 일종의 가산금리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0.22%로 일본(0.23%)·미국(0.28%)보다 낮다. 월가에는 ‘비관론자는 명성을 얻고, 낙관론자는 돈을 번다’는 속설이 있다. 추위에 대비해야 하지만 늘 움츠리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다.

우리 경제는 생각보다 튼튼하다. 전교 1·2·4등이 같은 반에 있어서 그렇지 전교 10위권이면 공부 잘하는 거다. 금고가 텅 비어 1997년 12월 3일 IMF에서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가 28년만에 4300억 달러의 외환을 쌓았다. 대외금융자산 역시 부채를 제외하고도 1조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연 4%의 수익만 거둬도 매년 400억 달러가 들어온다. 실제로 올 9월까지 투자수익은 243억 달러에 달한다. 젊은 세대들은 적극적인 해외 투자를 통해 ‘파이어(FIRE)족’을 꿈꾼다. 자산을 모아 월급이 필요없는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달성하고 조기 은퇴(Retire Early)해 유유자적 살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해외 금융자산의 수익으로 먹고사는 ‘파이어국(FIRE國)’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대외자산 3조7000억 달러를 가진 일본은 2011년부터 상품수지가 적자로 돌아섰지만, 투자소득 덕분에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김창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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