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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도 한 번, 커리어 도움" 대만, 한국 인재 이렇게 채간다 [신 재코타 시대]

중앙일보

2025.12.11 12:00 2025.12.11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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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301동(제1공학관) 1층 로비에서 미국 마이크론 대만법인이 현장면접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우림 기자
#지난 10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301동(제1공학관) 1층. 학과 점퍼(과잠)를 입은 학생들 사이에 정장 차림의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세계 3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의 대만법인 채용 면접을 기다리는 취업준비생들이다.

지난해 먼저 입사한 동기의 추천으로 지원했다는 허모(26)씨는 “대만에 글로벌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어 커리어 키우기에 유리하고 업계를 보는 시각도 넓힐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1회 면접으로 합격 결정’이라는 조건도 매력적이다. 지난해 국내 주요 대학 채용에선 총 98명이 합격했다.

지난달 8일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 겸 회장(왼쪽)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오른쪽)가 대만 신주에서 열린 TSMC의 연례 운동회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사인 마이크론이 대만을 고대역폭메모리(HBM) 핵심 생산기지로 삼으면서, 한국 인재 확보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8일 고려대를 시작으로 9일 한양대, 10일 서울대에서 채용에 나섰다. 합격자는 대만에서 근무한다. 미국 기업의 채용이지만, 대만 반도체 생태계로 한국 인재가 빨려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대만 신입 엔지니어 연봉은 대략 3만5000~5만 달러(약 5200만~7400만원) 수준으로 한국보다 높은 편이 아니지만, 팹리스(시스템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가 유기적으로 시너지를 내는 반도체 생태계의 매력을 내세운다.

그동안 동아시아 반도체는 ‘재코타(JaKoTa·일본·한국·대만)’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한국은 메모리, 일본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대만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맡는 ‘삼각 분업’ 구조다. 1980년대 이후 ‘압도적 메모리 1등’인 한국이 선두격이었으나, 최근 대만이 세계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를 중심으로 재코타의 새로운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김영옥 기자
대만의 TSMC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시가총액이 삼성전자(4421억 달러)에 밀렸지만 2021년 역전해 11일 현재 시총 1조 달러(1474조원) 기업으로 성장했다. 상장사 시총 기준 글로벌 8위다. 미국 빅테크(대형 기술기업)의 ‘대리 생산기지’ 정도였던 파운드리는 AI 공급망의 핵심이 됐고, 첨단 공정 수율을 확보한 TSMC에 일감이 쏠리고 있다.

TSMC의 독주는 대만 생태계를 살찌웠다. TSMC가 독차지하는 엔비디아 첨단 칩 물량은 폭스콘(서버 조립)과 ASE·SPIL(패키징)으로 넘어왔다. 애플 아이폰 제조사였던 대만 폭스콘은 단순 조립을 넘어 첨단 AI 서버 기업이 됐고, ASE는 세계 1위 첨단 패키징 기업이 됐다. 여기에는 미국 AI 반도체 양대 축인 엔비디아와 AMD의 최고경영자(CEO)가 모두 대만계인 것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김영옥 기자
일본의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2년 토요타·키옥시아·소니 등 8개 대기업을 동원해 파운드리 전문 기업 ‘라피더스’를 설립했고, ‘2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 공정 자립’을 목표로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했다. 누적 지원 규모가 2조9000억엔(약 27조원)에 달한다.

일본과 대만의 경쟁은 과열 양상을 띄며 ‘기술 유출’ 공방으로 이어졌다. 대만 검찰은 일본 장비기업 도쿄일렉트론(TEL) 대만법인이 TSMC의 2나노 기술을 일본으로 유출시켰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지난 8월 전·현직 TSMC 직원 3명이 TEL에 이직해 근무하면서 첨단 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됐는데, 이 기술이 TEL에서 라피더스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다. TEL은 라피더스에 장비를 납품하는 데다, 현재 라피더스 회장이 TEL 회장 출신이다. TSMC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지난해 일본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며 밀월을 자랑했는데, 여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차준홍 기자
한국도 이미 생존경쟁중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TSMC에서 21년 근무한 마가렛 한을 미주법인 파운드리 총괄로 영입했다. 파운드리는 대형 고객사 확보가 관건이라 TSMC·인텔·NXP반도체를 거친 ‘글로벌 인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10일 반도체 초격차를 위해 ▶12인치 40나노급 ‘상생 파운드리’ 구축에 4조5000억원 ▶첨단 패키징 기술에 3606억원 ▶반도체 클러스터에 700조원을 투자하는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한·일·대만의 관계 역전은 상전벽해 수준”이라며 “1990년대만 해도 한국이 일본 기술을 배우려고 도시바·히타치 은퇴 임원들을 고문으로 모셔왔는데, 이후 한국이 치고 나갔다가 이제는 대만이 앞섰다”고 말했다.

신현철 광운대 반도체시스템공학부 교수(반도체공학회 회장)는 “한국은 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신 교수는 “일본도 지금은 뒤처진 것 같지만 우습게 보면 안된다. 소부장 등 워낙 기술력이 뛰어나 이 정도로 정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 순식간에 한국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며 “더 많은 글로벌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도록 산업 규제는 풀고, 정부의 전략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우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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