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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 듯 말 듯

New York

2025.12.11 19:32 2025.12.1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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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im lee, wanderer 2, 2025, monoprint, 14 x 11 inches

sooim lee, wanderer 2, 2025, monoprint, 14 x 11 inches

내가 작기 때문인지 나는 덩치 큰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니와 거창한 것도 싫어합니다.
 
며칠 전 갤러리에서 만난 여자로부터 ‘영어 이름(sooim lee)을 왜 소문자로만 쓰느냐?’ 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전에도 서너 번 내 이름이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니냐? 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소문자로 쓸 때부터 뭔가 의도한 바가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질문받고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다 보면 절대로 어디에서도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제 나이 26살, NYU 재학 중에 만난 남자입니다. 그는 남미 콜롬비아에서 음악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서브웨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서 있던 그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 너 알아요.”
 
전 깜짝 놀랐습니다. 흰 피부에 슬픈 잿빛 눈동자를 한 배우 Jake Gyllenhaal처럼 생긴 훤칠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 기둥 뒤로 숨으려는 나를 본 그는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난 네가 사는 아파트 옆 건물에 살아요.”
 
같은 대학에 다니는 이웃 남자라니! 게다가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다니! 가슴이 콩콩거려 무슨 말로 대응할 줄 몰라 당황했습니다. 섬세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그는 얼마 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왜 학교도 끝나지 않고 떠나요?” 내가 물었을 때 그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그냥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지난 삶을 잊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도 타지를 떠돌까?’ 궁금해 구글링해 보고 싶지만,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만, 성은 외우기 어려워서 잊었습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그와는 반대로 뉴욕에 정착한 나는 나 나름대로 남과 다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다르다는 삶이 내 안에서 꿈틀대는, 그냥 내 작은 모습에 어울리는 작은 이름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원래 크고 굵고 충격을 주는 것보다는 보일 듯 말 듯 숨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선호합니다. 저의 그런 성향으로 판화 중에서도 날카로운 송곳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동판화(etching)를 전공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면서도 날카로운 가는 떨림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름을 소문자로 사용한다면 말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이수임 / 화가·맨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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