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이 멀리 보이는 황야에 진홍빛 물결이 흐르고 있다. 진흙탕 같기도, 용암의 일부 같기도 한 부드러운 곡선이다. 하얗게 반짝이는 눈 흔적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 ‘붉은 강’은 실제론 니켈 광미(광물 찌꺼기)다. 스테인리스강·배터리 등을 제조할 때 필수 광물인 니켈을 제련하며 생기는 독성 폐기물이다. 현대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산업 추출물이 자연으로 되돌아갈 때 벌어지는 위험성이 그림 같은 풍경 사진 속에 도사리고 있다.
캐나다 출신 사진가 에드워드 버틴스키(70)는 거대한 산업 현장과 이로 인해 영향받는 자연 경관을 특유의 미학으로 포착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다. 그의 40년 작업을 집대성한 회고전 ‘버틴스키: 추출/추상’이 13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해 2026년 3월 2일까지 열린다. 49점의 대형 사진(가로 148.59㎝× 세로 198.12㎝)과 8점의 초고해상도 벽화(최대 가로 800㎝× 세로 380㎝), 관련 장비·자료 등 총 85점이 선보인다. 지난해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와 베니스에 이어 아시아에선 첫 대규모 전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마크 메이어 전 캐나다 국립미술관장을 지난 12일 박물관에서 만났다. 약 30년전 버틴스키의 사진을 처음 접하고 그와 교류하며 활동을 지지해온 메이어 전 관장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장면을 아름답게 찍음으로써 관심을 끄는 게 버틴스키의 전략”이라고 한다.
때문에 전시 구성도 첫눈에 마치 추상(abstraction) 회화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먼저 배치했다. 예컨대 회색 색조가 비정형적인 역동성을 보이는 ‘광미 연못’은 실제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킴벌리 마을의 다이아몬드 채굴 폐기물 현장이다. 까마득한 상공에서 바라봤을 땐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폐기물 패턴이 현대 유화 작품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인간의 자원 추출(extraction) 흔적이다. 이렇게 추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추출의 실체를 직시하는 게 버틴스키가 평생 해온 방식이다.
그렇다고 환경주의자(environmentalist)는 아니라고 한다. “누구보다 환경에 대해 많이 알지만 그렇다고 환경보호 메시지가 목적이 아니다. 그는 예술가일 뿐”이란 게 메이어 전 관장의 설명. 오히려 인류가 지구(자연)를 활용해온 방식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로 인한 부작용의 두려움도 전할 뿐이다.
“사실 버틴스키는 초창기부터 첨단 장비와 기술·기법을 통해 사진 미학을 발전시켜온 작가예요. 그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를, 우리가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위해 가장 진보적인 사진 장비를 쓰죠. 사진 속 추출물들이 들어간…. 그는 무언가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보편적인 책임을 말하고 있어요.”
우크라이나 이민자 출신의 공장 노동자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버틴스키는 일찌감치 거대 산업현장에 매료됐다. 11살 때 처음으로 중고 사진장비를 갖게 됐고 여기 필요한 부대 비용을 벌기 위해 촬영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의 10대 시절 아버지가 산업재해성 질병으로 사망한 후 그는 산업과 자연,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대학에서 미술 수업을 통해 액션 페인팅 등 추상회화를 직접 접하고 이를 사진기법과 접목시켜 갔다.
지하 2㎞ 깊이 갱도에서 벌어지는 채굴 작업, 교량·댐·도로 등 건설 현장, 압착한 석유통이 레고처럼 층층이 쌓인 폐기물 풍경 등 그의 카메라가 포착한 세계 곳곳은 아슬아슬하게 매혹적이다. 인간이 지구상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는 시대인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실제로 버틴스키는 2018년 동료들과 영화 ‘인류세: 인류의 시대(Anthropocene: The Human Epoch)를 제작해 사진에 담아온 메시지를 확대하기도 했다.
“한국인들도 고도로 발달된 도시에 살기 때문에 19세기 산업현장 같은 걸 직접 접할 일이 거의 없죠. 그런데 우리 삶의 대부분은 그런 작업 위에 가능합니다. 버틴스키의 사진은 끌림과 혐오라는 혼합 감정을 만들어내는데, 한국인들도 다른 모든 세계인처럼 그런 감정이 들 것 같아요.”
오지영 학예연구사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요 주제가 도시의 발전과 역사 등인데, 이걸 색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전시”라면서 “산업적 숭고함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장 오디오가이드의 한국어 해설은 일상 속 재활용 실천을 통해 ‘쓰저씨’라는 별칭을 얻은 김석훈 배우가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