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부 소도시의 한 건설 현장에서 형틀 목수로 일하는 안모(49)씨는 최근 밀린 임금 일부와 퇴직금이 이번 달에도 지급되지 못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현장 공정이 지연되면서 원청에서 하도급업체에 지급하는 대금이 또다시 밀린 탓이다.
안씨에게 임금 체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건설업이 위축된 지난 1~2년 동안 그의 말마따나 “한두 달 밀리는 건 흔한 일”이 됐다. 그는 “대부분의 현장 기사들은 공사 대금이 들어오는 날에 맞춰 가정의 모든 계획을 잡는데 요즘은 그 날짜가 계속 미뤄진다”며 “월세도 제때 못 내고 생활도 갈수록 빠듯해지고 있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 “공구값이나 기름값 등 선비용이 계속 발생하는 나 같은 일용직은 당장 수입이 끊기면 정말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임금 체불→생계 위협→파산’의 악순환이 눈앞에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안씨와 같은 수많은 현장 근로자들을 옥죄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하지만 일선 노동청에 민원을 넣는 건 ‘마지막 수단’이다. 안씨는 “다음 달엔 주겠다는 언급만 있으면 일단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 강북의 재개발 현장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는 정모(45)씨도 마찬가지였다. 정씨도 최근 일당 17만원을 세 번이나 떼였지만 아무 말 못하고 ‘좋은 소식’만 기다릴 뿐이다. “노동청에 신고하라고요
? 그럼 다음 현장은 끝이에요. ‘검은 딱지’가 찍히면 불러주는 데가 없거든요. 임금 체불은 억울하지만 당하는 사람만 손해를 보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임금 체불액은 2조448억원으로 사상 처음 2조원을 넘어섰다. 올해도 지난 1~8월 임금 체불액이 1조4885억원으로 같은 기간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1조3700억원)보다 1년 새 1185억원(8.6%)이나 늘었다. 올 연말까지 전체 체불액도 지난해에 이어 최고 기록을 또다시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올해 임금 체불 피해 근로자 또한 지난 8월 현재 19만1632명으로 연말엔 28만 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건설업 불황이 체불 증가를 키우고 있다. 실제로 국내 건설업 종사자는 17개월 연속 감소 추세다. 프로젝트 중단이나 도산이 늘면서 하도급·일용직·외국인 노동자 등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밀린 돈’의 충격이 그대로 전가되고 있는 모습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건설업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 자체가 체불을 낳기 쉬운 구조”라며 “불황이 닥치면서 윗선에서 돈줄이 막히면 그 여파가 맨 아래 단계에 있는 일선 근로자들의 임금 체불로 이어지는 만성적인 패턴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체불 통계에서 퇴직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일당이나 월급은 일부라도 지급하면서 목돈이 들어가는 퇴직금은 “나중에 주겠다”며 차일피일 미루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는 사례도 계속 늘고 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장은 “지금의 퇴직금 제도 자체를 손보지 않으면 체불을 구조적으로 줄이기 어렵다”며 “퇴직금을 회사가 보유하는 방식에서 금융기관이 관리하는 퇴직연금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 제도를 시급히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정부는 현재 임금채권보장제도를 통해 체당금 형식으로 체불 피해를 일부 보전해 주고 있다. 사업주가 도산했거나 지급 능력이 없는 경우 국가가 먼저 일정액을 노동자에게 지급한 뒤 추후에 사업주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김남석 법무법인 위민 변호사는 “체불을 해도 실제 실형이 선고되는 사례는 거의 없고 나중에 돈만 주면 선처되는 분위기다 보니 체불에 둔감한 사업주들이 적잖다”며 “경기 불황 탓에 어쩔 수 없이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와 악의적으로 체불하는 경우를 명확히 가르고 후자에 대해선 훨씬 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부도 임금 체불을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하고 대응 수위를 높이고 나섰다. 지난달엔 임금 체불 사업주에 대한 법정형을 3년 이하 징역에서 5년 이하 징역으로 상향하고 상습 체불 사업장 공개도 확대하기로 했다. ‘임금 체불 신고 사건 전수조사’ 제도를 도입해 노동자 한 명이 체불을 신고하면 해당 사업장 내 다른 노동자들의 체불 여부도 함께 확인하는 대책도 단계적으로 시행해 나가기로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만으론 체불의 악순환을 끊기 어렵다”며 제도적 보완책을 한목소리로 주문하고 있다. 양승엽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해외에선 임금이 채무 변제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놓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 비해 국내에선 임금이 늘 은행이나 납품업체에 지급하는 돈보다 후순위로 밀리는 게 현실”이라며 “정부와 재계가 힘을 모아 임금이 최우선이란 원칙을 분명히 세운 뒤 상습·고의 체불 사업주는 엄격하게 제재하는 등 ‘예방 효과’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