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기억하던 몇몇 장소에 나를 데려가셨다. 난징이 왕국이나 제국의 수도였던 시절의 유적들도 있었다. 삼국시대의 오나라와 진나라, 5-6세기 남조의 제초양진(齊楚梁陳) 네 왕조, 그리고 그로부터 천년 후 명나라 초기의 짧은 기간. 19세기 중엽 홍수전(洪秀全)과 기독교인들이 세운 태평천국의 수도였던 시절의 유적도 있었다.
[역주: 한나라 멸망(220)에서 수나라 통일(589)까지를 “6조 시대”라 부르는데, 삼국 중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위-진-제-초-양-진을 6조로 본다. 그러나 근래는 6조를 남중국의 왕조로 보는 관점에서 위나라 대신 오나라를 넣고 오나라 건국(222)을 6조 시대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군 아래 왕징웨이 괴뢰정권과 관련된 장소들도 알려주셨다. 그에 곁들여 국민당 간부였다가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했던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도 말씀하셨다. 첸공보(陳公博)는 1946년에 처형당했는데 저우포하이(周佛海)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왜 두 사람의 처분에 차이가 있는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징웨이 자신은 전쟁이 끝나기 전 1944년에 죽어서 전범재판을 면했다. 그 부인 말라야 페낭 출신의 첸비쥔은 그런 복이 없어서 여생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페락의 왕징웨이 지지자들 이야기 중에 이포에 있던 첸비쥔의 오빠 이야기도 하시고 말라야 중국인 지도자들 사이의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에 걸친 복잡한 관계도 말씀하셨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중국인 교육에 끼칠 영향을 걱정하셨다.
중국인사회의 바닥에 깔려있는 문제들에 관한 말씀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몇 해 후 말라야 비상계엄 기간 중 페락 주 벽지의 학교들을 시찰하고 계실 때 당신의 교육 이념을 살리기 위해 어떤 일이 필요한지 여쭈어본 일이 있다. 말씀을 아끼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만 하시고 닌징에서처럼 생각을 털어놓지 않으셨다. 조기 퇴직을 택하시기 전 몇 해 동안 분투하시는 모습을 보며 그분 마음속을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동창인 중난(鍾南)중학 교장 챠오이판 선생을 찾아갔을 때 시내의 암울한 상황을 들었다. 정부는 부패가 만연하고 내전이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었다. 행정을 유지할 재정 수입이 모자라 오르는 물가에 공무원 봉급을 맞춰줄 수 없었다. 난징 사람들은 국민당정부의 귀환으로 좋아진 것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챠오 선생의 지적 하나는 이포에서부터 알고 있던 문제여서 특별히 주의를 끌었다. 1937년 대학살 피해자들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해자 지원에 성의가 없는 데 난징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했다. 내전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보상 문제가 지연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시절 중국의 과제 중 고등교육보다 더 급한 것이 많았다. 난징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대상은 내전이었다. 신문에는 정부의 공비(共匪) 박멸 의지가 끊임없이 강조되었고 조그만 승리라도 있으면 대문짝처럼 실렸다. 국민당 측의 관점이 분명했는데, 정부의 곤경에 대한 다른 관점들도 있다고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다.
몇 달 전 난징의 학생운동 규제에 관해 주의 말씀이 있었다. 중앙대학을 비롯한 대학 캠퍼스에 경찰이 들어갔고 학생운동 지도자 몇 명이 투옥된 일이다. 학생운동의 주된 표적은 기아와 인플레 등 경제 문제였지만, 정부가 공산당과 싸우며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제에도 비판이 나왔다. 베이징에서 미군 병사의 여학생 강간 사건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1947년 여름까지 난징의 데모 금지로 길거리는 좀 조용해졌으나 민생을 위협하는 인플레에 대응해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임금 인상 운동 보도가 계속되었다.
내전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귀국 이야기를 내게 처음 꺼내신 이래 중국은 끝없는 전쟁 속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쟝수성의 두 분 고향 모두 전투와 가까운 곳이어서 두 분은 내전 속에 자라난 셈이었고, 1946년의 내전 재개는 그분들 세대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갈등을 풀어낼 다른 길이 없어서 정부가 전후 재건사업에 전념할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 분명하셨으나 내전 재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생각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난징에 도착할 때는 국민당군의 유리한 조건이 확실해 보여서 결국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곧 고위층의 부패상과 함께 병사들 대우가 형편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물가 상승으로 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사회에 넘쳐나는 고통이었다.
나도 일본 점령 말기 말라야의 인플레 경험이 있다. 쌀값이 너무 비싸 많은 사람이 고구마나 타피오카로 연명했다. 지저분한 야자유를 부엌에서 썼고 채소값은 날마다 올라갔다. 우리는 다행히 먹을 만한 음식을 밥상에 올려주는 집에 얹혀살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돈을 너무 많이 찍어서 그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단파라디오 영어방송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일본인이 찍은 돈이 영국인의 귀환 후 통용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통화가치의 하락이 일상생활에 끼치는 영향을 아는 것도 난징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의 봉급이 작은데도 생활을 유지하고 나아가 타이저우의 가족을 도와주기까지 할 수 있는 까닭도 알고 있었다. 저축을 말라야 달러로 갖고 계시면서 환율 하락에 맞춰 조금씩 환전하신 것이다.
내게도 같은 방식을 가르쳐주셨다. 말라야로 먼저 돌아가신 후 매달 한 차례 홍콩 돈 15달러를 송금해주셨다. 상하이의 삼촌은 그 돈을 한 번에 1달러씩만 바꾸도록 가르쳐주었다. 바꿔 받는 지폐뭉치는 매일 가치가 떨어졌다. 이 상황으로 국민당정부는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지배집단 사람들과 영리한 사업가들이 재산을 미국 달러와 금괴로 바꿔놓는 동안 서민들의 생활은 나락에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상황은 계속 악화했다. 1948년 여름에는 미국 1달러가 법폐(法幣) 1천1백만 위안으로 교환되었다. 난징 정부는 마침내 법폐 3백만 위안을 금원권(金元卷) 1위안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해 여름 상하이 숙부댁에 가 있었는데, 돈 바꾸려는 사람들의 줄이 은행 밖으로 길 건너까지 이어진 모습이 중심가의 숙부 사무실에서 보였다. 우리도 환전한 뒤에 보니 새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가게가 명령에 따라 열려 있었으나 진열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상인들이 밤새 물건을 옮겨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난처하게도 식당이나 식품가게에서도 점심으로 먹을 음식을 찾을 수 없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蒋经國)가 상하이 시장이었는데, 모든 미국 달러와 금화와 금괴를 금원권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금이나 달러를 갖고 있다가 걸리는 사람은 처형하겠다고 협박했다. 난징에서 1년 동안 통화 혼란에 익숙해진 나도 새로 일어난 혼란과 공포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당 정권에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그 여름 동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정권의 종말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모든 학교 친구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오랜 후 그 끔찍한 인플레 소용돌이의 전모를 밝히는 연구성과들을 보게 되었는데, 난징에 처음 갔을 때부터 인플레가 얼마나 무서운 현상인지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1948년 봄 말라야로 돌아가기 직전에 아버지도 걱정이 많이 된다고 인정하셨다. 빠른 시일 내에 내전에서 확고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정권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 몇 달 전의 낙관적인 말씀과 너무 큰 차이에 놀라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적어도 겉보기로는 난징을 신중국의 위대한 수도로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통일된 중국의 새로운 “황제”가 누가 되느냐를 놓고 승자독식의 참혹한 투쟁이 또 한 차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이 국민당의 승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밖에서 들어온 나로서는 어느 쪽 편을 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내 희망은 어느 쪽으로든 빨리 결판이 나서 오랜 전쟁과 파괴로부터 재건사업을 서두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정치를 펼칠지는 판단할 길이 없었으나 국민당의 패퇴가 분명해지는 동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이 더 못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