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발병 위험을 크게 높이는 희귀 유전자 돌연변이를 지닌 정자 기증자의 정자가 유럽 전역에서 사용돼 최소 197명의 아이가 태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일부는 이미 암으로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11일(현지시간)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이 기증자는 리-프라우메니증후군(Li-Fraumeni syndrome)을 유발하는 TP53 유전자 돌연변이를 갖고 있었다. 이 증후군은 소아암을 포함해 평생 암에 걸릴 확률을 높이는 희귀 유전 질환이다.
조사 결과 이 남성은 자신의 유전자 이상을 인지하지 못한 채 정자를 기증했다. 초기 조사에서는 그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유럽 8개국에서 최소 67명으로 파악됐지만, 이후 BBC를 포함한 14개 유럽 공영방송이 정보공개 청구와 의료진·환자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결과 출생 아동 수는 최소 197명으로 늘어났다. BBC는 “모든 국가의 자료가 확보된 것이 아니라 실제 규모는 더 클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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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국 67개 병원에 공급…규제 허점 드러나
이 남성은 덴마크의 민간 정자은행인 유럽 정자은행(ESB)에 단일 기증자로 등록했으나, 그의 정자는 14개국 67개 난임 클리닉에 공급된 것으로 파악됐다.
유럽 정자은행은 2023년 11월 추가 조사를 진행한 뒤 해당 기증자의 정자 사용을 전면 중단했다. 다만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실제로 얼마나 많은 수가 돌연변이를 유전받았는지는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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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발병 위험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참혹”
문제는 이 돌연변이를 물려받은 경우 평생 암을 피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점이다.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에 따르면 리-프라우메니증후군 보유자는 60세까지 암 발병 확률이 90%에 달하고 40세 이전 암이 발생할 확률도 약 50%에 이른다.
이 증후군을 가진 환자들은 매년 전신 및 뇌 MRI 검사와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아야 하며, 여성의 경우 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예방적 유방 절제술을 선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BBC는 전했다.
앞서 지난 5월 프랑스 루앙대학병원의 생물학자 에드위즈 카스퍼는 유럽 인간 유전학회 연례회의에서 이 기증자의 정자로 태어난 아동 67명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카스퍼는 “그중 10명은 뇌종양 등 암 진단을 받았고, 또 다른 13명은 돌연변이를 지녔지만 아직 암이 발병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아이들은 암 위험이 높아 정기적인 의료 감시가 필요하며 향후 자신의 자녀에게 돌연변이를 전달할 확률도 50%”라고 덧붙였다.
영국 런던 암연구소의 암 유전학 클레어 턴불 교수는 “리-프라우메니증후군 진단은 평생 소아암을 포함한 암 발병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가족에게 매우 참혹한 소식일 수 있다”며 “만 명 중 한 명꼴로 나타나는 희귀 돌연변이 보유자의 정자가 다수의 출생에 사용된 불운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해당 정자는 영국 내 클리닉에는 직접 공급되지 않았지만, 덴마크 당국은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영국 인간수정배아관리청(HFEA)에 일부 영국 여성이 덴마크에서 난임 치료를 받았다고 통보했다. HFEA의 피터 톰슨 최고경영자는 “아주 소수의 여성만 해당된다”며 “이들은 치료를 받은 덴마크 클리닉으로부터 이미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BBC는 기증자가 선의로 기증했고 영국 내 관련 사례들이 모두 통보된 점을 고려해 기증자 식별번호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유럽 정자은행 대변인 줄리 파울리 부츠는 “이번 사건과 희귀 TP53 돌연변이가 여러 가족과 아이들, 그리고 기증자에게 미친 영향에 깊은 유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ESB는 과학적 기준과 법률에 따라 모든 기증자에 대해 검사를 실시하고 개별 의료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며 “단일 기증자를 통해 태어나는 아이 수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요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다만 “관련 법률은 매우 복잡하고 국가별 규정 적용도 달라 유럽 차원의 공통되고 투명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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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암의 그림자와 살아야…여러 번 싸울 것”
프랑스의 싱글맘 셀린(가명)은 14년 전 이 기증자의 정자로 아이를 낳았고, 최근 딸이 유전자 변이를 지닌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벨기에의 난임 클리닉으로부터 아이에 대한 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셀린은 기증자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원망이 없다”면서도 “위험을 가진 안전하지 않은 정자를 제공받았다는 점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언제, 어떤 암이, 몇 개나 발생할지 모른다”며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 있고 그때가 오면 싸울 것이고 여러 번이라면 여러 번 싸울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