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충북 음성에 위치한 충북반도체고등학교의 실습장. 방진복을 입고 공기 샤워를 마친 뒤 ‘옐로우 베이’에 들어갔다. 노란색 조명이 가득한 공간엔 얇은 웨이퍼 위에 정밀한 회로도를 그리고 표면을 깎아내는 설비가 설치돼 있다. 동행한 백종인 산학협력 부장교사는 “실제 반도체 제조엔 미세한 빛의 파장이 영향 줄 수 있어 영향이 덜한 노란색 조명을 쓴다”며 “실습시설이지만 몇 가지만 빼면 실제 생산라인과 거의 다를 바 없다”고 설명했다.
화이트보드엔 학생들이 남긴 메모가 가득했다. 고3 김재석군은 “(실제 공정과 달리) 인체에 무해한 질소 가스를 사용해 몇몇 단계가 생략되긴 하지만, 확실히 책으로 보는 것보다 이해가 빨리 된다”고 말했다.
충북반도체고는 총 7곳의 반도체 분야 마이스터고 중 가장 먼저 개교했다. 본관·강당·기숙사·실습동 등 총 8동의 건물이 있는데, 최근엔 충북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반도체 교육지원 센터’를 짓고 있다. 3년 전 대기업이 기증한 고가의 반도체 제조 장비가 들어갈 예정이다. 학생들은 반도체 재료와 설계뿐 아니라 제조 공정과 프로그래밍 등을 배울 수 있다. 백종인 교사는 “학생뿐 아니라 재취업을 원하는 성인도 교육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충북반도체고는 올해 2월 졸업생 취업대상자 111명 중 107명이 취업해, 취업률 96.4%를 기록했다. 평균 취업률이 55.2%에 그치는 다른 직업계 고등학교들과 대조적이다. 취업 질도 우수하다. 20명이 삼성 등 대기업에 취업했고, 다른 졸업생도 대부분 외국계 반도체 장비 회사 또는 대기업 협력 업체에 입사했다. 서운석 교장은 “올해 반도체 호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기업에서 숙련된 인력을 더 많이 요구한다”며 “내년엔 대기업 취업 비중도 한층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청년 취업 한파 속에서도 취업률이 고공행진하자 반도체고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관심도 그만큼 높아졌다.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가까운 수원하이텍고(마이스터고)의 입학 경쟁률은 2.7대 1을 넘었다. 중학교 성적이 상위 5% 내에 들지 못하면 합격을 장담하기 어려울 만큼 우수 학생이 몰린다.
특히 올해는 SK하이닉스의 거액 성과급 지급,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 등으로 학생·학부모의 관심이 커졌다. 허지화 수원하이텍고 부장교사는 “대기업에서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학부모들이 자녀를 보내고 싶어 학교로 문의하기도 한다”며 “무작정 대학에 보내기보다 일찌감치 취업을 목표로 한 전문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삼성디스플레이 상무 출신으로 외부 공모를 통해 부임한 장용규 교장은 “공고 시절에는 지역 내 기피 학교였지만 이젠 과학고·외국어고는 갈 수준이 돼야 입학이 가능한 명문 학교가 됐다”고 말했다.
재학생들은 취업은 물론 이후 진로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3학년 전은지양은 “대학에 가면 졸업까지 길게는 5~6년이 걸리는데 (나는) 그 기간 전문성을 충분히 쌓을 수 있다”며 “대기업 입사 뒤 재직자 전형을 활용해 대학원까지 진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학교 3년간 내신 성적 196.4점(200점 만점)을 기록했던 전양은 삼성전자 고졸 공채를 준비하고 있다.
시중 은행의 기술직군에 이미 합격한 고3 강희준 군은 방학 중 삼성전기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강군은 “대기업에서 2주 동안 카메라 모듈 부품을 검수하는 자동화 설비를 직접 다뤄봤다”며 “일반고에서 할 수 없는 경험을 한 게 취업에 큰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졸업생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수원하이텍고를 졸업한 뒤 모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정모(23)씨는 “아직 억대 연봉은 아니지만 2~3년만 일해도 직장 근처에 원룸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은 된다”며 “대졸자 직급까지 가려면 4년 정도 걸리는데 그 기간에 받은 연봉과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 아낀 학비를 생각하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술 장인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마이스터고는 전국에 모두 59개교가 있다. 이중 7곳(2곳은 개교 예정)이 반도체 분야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마이스터고는 학비가 전액 무료다. 전국 단위로 모집하고 있어, 다양한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함께 공부한다.
이진우 교육부 중등직업교육정책과장은 “방학 때는 연계 기업에서 2~3주간 산학 맞춤형 교육 과정을 받고 학기 중엔 전공과 관련된 동아리 활동을 한다”며 “모든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라 오후 10시까지 이론 학습과 기술 훈련에 매진해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3년 동안 압축적인 훈련을 받은 졸업생들은 기업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해당 기업은 이 학교 졸업생들을 계속 채용하는 선순환이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다만 학생에 따라 숙식을 함께하는 단체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남학생의 경우 몇몇 대기업이 군미필자 채용을 꺼린다는 게 걸림돌로 남아 있다. 장용규 교장은 “군 미필자들에게 기업들이 취업 문을 더욱 열어야 고졸 취업도 활성화되고 마이스터고에 우수한 학생들이 계속 들어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명희 한성대 교학부총장(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장)은 “고졸 취업의 확산을 위해 마이스터고 같은 산업 맞춤형 학교를 확대하는 한편, 특히 ‘선취업-후진학’ 등 일-학습 병행이 가능한 시스템을 안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