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는 이날 "최휘영 장관이 오후 2시 정부를 대표해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화훈장은 문화예술 발전과 국민의 문화 향유에 뚜렷하게 기여한 이에게 주는 훈장이다. 금관은 그중 최고등급으로, 해당 분야의 개척자나 원로급 인사에게 수여한다.
문체부는 “고인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한 시대의 영화 문화를 상징하는 배우였다”며 “한국 영화 제작 기반 확충과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한국 영화 생태계 보호와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도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고인은 지난 1997년 보관문화훈장, 201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바 있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며, 한국 영화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여자 스타로 군림했던 배우 김지미는 지난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85세.
고인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1950년대 중반, 기지개를 켜던 한국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90년대 초까지 스크린에서 꾸준히 활약했다. 수십 년 간 ‘미(美)의 대명사’이자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대체 불가능한 연기와 아우라를 스크린에 새겨 넣었다.
자신이 제작까지 겸한 ‘명자 아끼꼬 쏘냐’(1992·감독 이장호)까지 그가 출연한 작품은 700여 편에 달한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60~70년대에는 한 해에 30여 편의 영화를 찍느라 하루에도 몇 편씩 겹치기 촬영을 해야 했다.
194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난 고인은 덕성여고 2학년 때 명동 다방에 놀러 갔다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황혼열차’(1957)로 데뷔했다. ‘별아 내 가슴에’(1958·홍성기)의 흥행으로 스타가 된 고인은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박종호), ‘장희빈’(1961·정창화) 등에 출연하며 196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영화계의 유명한 여장부로 통했던 고인은 제작자로도 왕성히 활동했다. 1986년 영화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한 뒤 ‘티켓’(1986·임권택),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장길수)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1995),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1998), 영화진흥위원회 위원(1999) 등 영화 행정가로도 일했다.
고인은 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상·대종상 등을 수십 차례 받았다. 2010년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2015년에 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 가운데 하나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돼 원로 영화인으로서 한국 영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2019년에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시상하는 ‘아름다운 예술인상’(공로예술인 부문)을 수상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별세한 고 이순재 배우에게도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외에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배우로는 2021년 윤여정, 2022년 이정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