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4시쯤 전북 전주 남부시장 ‘로컬공판장 모이장’. 작가 91명의 그림·판화·조각 등 작품 231점이 전시 중이었다. 전시회 이름은 ‘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 일명 ‘은자전’.
1993년부터 남노송동·동문사거리를 거쳐 현재 다가동에서 술집 ‘새벽강’을 운영하는 강은자(68)씨가 33년간 모은 소장품으로 꾸몄다. 가게 손님으로 온 가난하고 이름 없는 젊은 예술가들을 응원하기 위해 한 점, 두 점 산 작품이다. 지금은 중견 작가로 성장한 곽승호의 ‘까까까까치호랭이’, 고형숙 ‘일상의 풍경-사라지는 것들’, 이일순 ‘달-노래’, 유대수 ‘함양상림’ 등이 전시장을 빼곡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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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작가 안쓰러운 마음에 작품 구매”
이번 전시회를 위해 강씨와 인연을 맺은 작가를 포함해 ‘새벽강을 추억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주최자·후원자로 의기투합했다. 정작 이날 전시장엔 강씨 대신 새벽강 단골이자 자칭 ‘은자 언니 추종자’라는 최미진(52)·이재원(45)씨가 관객을 맞았다.
최씨는 “언니는 오전에 있다가 좀 전에 장사 준비하러 새벽강에 갔다”며 “안쓰러운 마음에 글·그림을 사주고 명절에 돈이 없어 고향에 못 가는 예술가들에게 ‘밥 먹고 가라’고 챙기는 등 새벽강은 작가들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70대 아버지부터 아홉 살 아들까지 3대가 새벽강 팬이라고 소개한 이씨는 “새벽강 국수를 좋아하는 아들이 전시회 개막식 때 춤을 췄다”며 “언니 때문에 집안 족보가 꼬였다”고 했다. 나이 불문하고 강씨를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 게 단골의 불문율이라는 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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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나윤선도 찾아…기획전도 20회 개최
주최 측에 따르면 새벽강은 문학·미술·국악·연극 등 다양한 분야 예술인이 모이는 사랑방이자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정양·김용택·안도현 시인 등도 새벽까지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하거나 턴테이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판을 벌였다고 한다. 전북작가회의·전북민족미술인협회 등의 전시 모임이나 행사 뒤풀이 장소로도 인기다. 풍물패 ‘겐지갱’ 출신인 강씨도 장구·징을 치며 함께 어울린다고 한다.
전주국제영화제·전주세계소리축제 등이 열리면서 새벽강은 전주의 맛과 멋을 즐기려는 외부 유명인에게도 입소문이 났다. 영화평론가 유지나, 가수 전인권·나윤선, 소설가 공지영 등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강씨는 새벽강을 기꺼이 갤러리 장소로 내주기도 했다. 2000년 곽승호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6년 김춘선 개인전까지 20차례에 걸쳐 ‘새벽강 기획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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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우 “새벽강 진미는 ‘강은자’”
이날 전시장을 나온 기자는 ‘전주 지역 예술계 대모’를 인터뷰하기 위해 새벽강을 찾았다. 그러나 수저를 삶고 있던 강씨는 “인터뷰는 안 해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다만 가게 내부는 “찍어도 된다”고 했다. 앞서 전시장에서 들은 “언니는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는 말 그대로였다.
이런 강씨에 대해 극작가 최기우(52)씨는 “새벽강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편하게 놀 수 있는 곳”이라며 “그곳의 진미는 ‘강은자’다. 욕심 없고 푸진 주인장, 주인과 손님이 아니라 한 인간과 나란히 혹은 비스듬히 시선을 맞출 수 있는 ‘은자표 특별 감미료’가 있고, 그 맛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6일 개막한 은자전은 14일로 끝난다. 하지만 작품과 강씨는 새벽강에서 계속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