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서교동 KT&G 상상마당 홍대 라이브홀(이하 상상마당). 무대에 나란히 선 록 밴드 크라잉넛과 권정열(십센치)이 크라잉넛의 ‘명동콜링’을 열창했다. 마이크를 잡은 권정열은 원래 가사인 ‘언제나 우리들은 영화였지’라는 문장의 주어를 크라잉넛으로 바꿔 노래했다. 크라잉넛의 데뷔 30주년을 축하하는 공연 ‘너트 30’의 취지가 잘 드러난 장면이었다. 공연이 많지 않은 월요일임에도 홀을 가득 메운 관객 400여명은 환호성으로 답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침체됐던 국내 인디 음악 씬에 다시 훈풍이 불고 있다. ‘인디 1세대’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다양한 음악 장르와 실력을 바탕으로 한 신예들도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올 들어 가장 눈에 띄는 움직임 중 하나는 인디 1세대들의 활발한 활동이다. 인디 씬 형성 30주년 기념 공연들이 계기가 됐다. 대중음악계에서는 1995년 홍대 라이브 클럽 ‘드럭’에서 록 밴드 너바나의 멤버 커트 코베인의 추모 공연이 열린 것을 인디 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올해는 라이브 클럽 ‘빵’ ‘롤링홀’뿐만 아니라 상상마당 등 홍대 곳곳에서 인디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연이어 열렸다. YB, 노브레인 등 ‘레전드 밴드’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무대를 장식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크라잉넛은 지난달부터 김창완밴드, 잔나비, 장기하, 김수철 등을 초청하는 시리즈 콘서트 ‘너트 30’을 다음달 30일까지 진행한다. 정주란 상상마당 PD는 “이미 대중적으로 유명세를 탄 많은 인디 출신 뮤지션들이 선뜻 일정을 내줬고 십센치 등은 노개런티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새롭게 컴백한 1세대 뮤지션들도 있다. 뉴메탈 밴드 ‘세기말’은 1세대 인디 밴드인 옐로푸퍼 출신 DJ 증재와 보컬 710, 레이지본의 ‘티제이’ 등이 뭉친 그룹이다. 이들은 지난해 5월 첫 싱글 앨범 ‘Break it’을 발매한 데 이어 홍대 라이브 클럽 빅팀, FF 등의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노브레인의 1세대 멤버였던 차승우도 올해 ‘차승우와 사촌들’을 결성하고 홍대로 컴백했다.
1세대들이 소규모 공연장으로 돌아왔다면, 신예들은 오히려 홍대 밖 대형 콘서트홀로 진출하는 활약상을 보였다. 2021년 데뷔한 록밴드 터치드는 지난 1월 3000여석의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하이라이트Ⅲ’를 ‘완판’ 시킨 데 이어 내년 1월엔 5000여석의 티켓링크 라이브 아레나에서 단독 콘서트 ‘하이라이트Ⅳ’를 연다. 2022년 결성된 ‘지소쿠리클럽’은 지난해 500석 규모의 무신사 개러지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연 데 이어, 지난 3월에는 900석 규모의 신한카드 솔페이스퀘어 라이브홀에서도 단독 콘서트 ‘등반가들’을 열어 전석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지난 6~7일에 열린 단독 콘서트 역시 2000석 규모의 예스24라이브홀이 꽉 찼다.
이런 흐름은 내년에도 확대될 것이라는 게 음악계 중론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댄스 뮤직에 치우친 K팝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다양성을 인디 씬에서 찾는 청취자들이 늘고 있다”며 “꼭 공연장을 찾지 않아도 온라인 상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는 청취 환경 역시 인디 음악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축제, 페스티벌 등 오프라인 무대가 코로나 이전으로 복귀되고, EBS 스페이스 공감의 무료 공연과 신인발굴 프로그램 ‘헬로 루키’가 내년부터 재개되는 것도 긍정적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공감의 무료 공연은 2023년, ‘헬로루키’는 2022년 이후 예산 부족 문제로 중단된 바 있다.
인디 밴드의 무대, 음원 발매를 지원하는 사업들도 성황이다. ‘인디 등용문’으로 꼽히는 CJ문화재단 ‘튠업’의 경우 코로나 때 91대1로 떨어졌던 경쟁률이 올해 131대1까지 늘었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의 ‘인디스땅스’, 마포음악창작소의 ‘인디스커버리’ 등 지방자치단체 산하기관들도 지원에 나서고 있다. 고영근 마포문화재단 대표는 “우리는 마포아트센터에서 진행하는 오디션을 무료 공개해 구민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뮤지션들에겐 성장의 기회를 주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인디 씬의 양적 확대가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도헌 평론가는 “지금의 인디 음악 붐은 씬 자체의 노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청취 환경 변화가 가져다 준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김천성 롤링홀 대표는 “일부 인디 레이블은 기획사가 연습생을 훈련시키고 팬덤을 유도하는 등 K팝 레이블과 모습이 비슷해지고 있다”며 “인디 음악만이 가질 수 있는 독립성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